8화_예의 없는 슬리퍼

공무원 남편을 둔 전업주부들의 소소한 수다

by 쓰는수 이지수

공무원 남편을 둔 전업주부들의 소소한 수다

8단지 구석에 있는 한 놀이터는 좀 더 늦게 지어진 것인지 나중에 리모델링을 한 것인지 몰라도 예쁘게 색깔이 칠해진 모습이었다. 지수의 아이들은 그곳을 뱀 놀이터라고 불렀다. 구불구불 회오리 모양으로 내려오는 미끄럼틀의 마지막 부분에는 뱀 얼굴이 있었다. 한쪽에는 아래쪽에 굵은 스프링이 있는, 혼자서 타는 시소가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 놀이기구를 제일 좋아했다.



앞 뒤로 기우뚱기우뚱하는 그 시소를 거세게 움직이면 앞쪽으로 내려왔을 때 코가 땅에 닿을 만큼 기울어졌다. 가만히 보면 아이들의 거친 운동으로 인해 그것의 뒤쪽은 약간 들려있고 이미 앞쪽으로 꽤나 기울어진 상태였다. 지금 그녀의 아이들도 시소가 기울어지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앞으로도 점점 더 기울어질 것이고 그것은 바르게 다시 심어지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앞쪽으로 고꾸라져 있는 그것을 볼 때마다 지수는 있는 힘껏 뽑아서 나무처럼 반듯하게 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9단지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때 그곳으로 가보면 두 녀석이 어김없이 놀고 있었다. 그곳에도 모래는 있었다. 9단지보다 깨끗하다고 느껴지는 모래였지만 모래는 모래였다.



아이들이 노는 동안 그녀는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하교 시간이 되기 전까지 그녀의 아이들은 이 놀이터를 독차지했다. 가끔 아장아장 걷는 손주를 데리고 놀이터에 나온 할머니는 도겸이와 다원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고 오늘 하루 유치원에 안 가고 엄마가 놀아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벤치 옆자리에 두 여인이 와서 앉았다. 이 동네 주민처럼 보이는 둘은 조용조용 학교 이야기, 선생님 이야기, 학원 이야기 등을 이어갔다.


"여기 스토어 2층에 수학 학원 잘 가르친데요. 애가 제대로 할 때까지 붙잡아놓고 집에 보내질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가깝고 다니기에도 좋긴 하겠어요. 애들 학원은 일단 가까워야 돼요."

"옆집 엄마도 애를 그 학원에 보내는데 어느 날은 세 시간이나 있다 왔대요. 그러니 점수가 올라가지 안 올라가겠어요?"


지수는 아이들에게 눈길이 쏠려있는 척하면서 그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한 아주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놀이터로 들어왔다. 화장끼 없는 얼굴을 하고 고무줄로 찍 묶은 머리는 조금 전까지 방바닥에 드러누워 있다가 막 일어나서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지수의 시선은 아줌마가 입은 브이넥 티셔츠의 둥글둥글한 옆구리 부분을 지나 고무줄 반바지에 잠시 머물다가 아래쪽에 굵직한 다리를 찍고 거친 모습으로 삼선 슬리퍼에 담겨 있는 맨발에 멈추었다. 그 걸음은 바쁘게 모래 위를 저벅저벅 걸어갔다. 차림새만 보면 마트로 직행을 해야 할 것 같지만 아줌마의 손에는 네모 반듯한 검은색 서류 가방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그 아줌마는 놀이터 한가운데쯤 걸어가다가 고개를 휙 돌려 이쪽으로 보더니 "어?" 하며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갈길을 갔다. 옆에 앉아 있는 둘 중 한 명이 인사를 받았다.




두 여인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나 처음에 저런 차림으로 집에 와서 깜짝 놀랐잖아요. 지금도 저러고 애들 가르치러 가는 거잖아요. 가방은 서류 가방이네?"

"아니, 저 아줌마가 학습지 선생님이라고요?"


두 여인은 소곤소곤하다가 자리를 떴다.



지수는 그 둘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건물 안쪽으로 사라지자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도 브이넥 티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고무줄 반바지, 그리고 맨발바람으로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저 아줌마와 싱크로율이 맞아떨어질 만큼 감지 않은 머리를 찍 묶은 채였다. 놀이터에서 흙먼지를 묻히고 마트에 직직 끌고 갈 슬리퍼는 그녀의 발에도 신겨 있었다. 옆에는 검은색 서류 가방이 아닌 남편이 사 준 노스페이스 크로스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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