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5
4번의 하교가 좀 늦었지만 어디에서 친구들과 놀고 오겠거니, 엄마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판단이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을 하나 보니 4남매를 신경 쓴다는 건 얼마나 고된 일일까 상상이 가질 않는다. 고작 아이 둘을 키우면서 엄청나게 고생을 한 것으로 스스로 자부하는 나 자신을 오만함의 일종으로 깨닫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독박육아'를 해 온 우리 엄마들 세대에는 그런 명칭조차 생겨나기 전이여서 그 홀로 하는 육아라는 것이 당연시 여겨졌다. 홀로 아이들을 신경 쓰는 동안 왠지 '고되고 힘들다'라는 감정은 분명히 가졌을 텐데, 다들 그렇게 사니까, 힘들다고 느끼는 것이 맞긴 한가 아리송해하면서 오히려 스스로를 타일렀을 엄마 세대를 떠올려본다. 아! 끔찍해. 애 둘 이하를 키우는 엄마는 입꾹! 해야 할 것 같다.
내 엄마도 힘들다는 말없이 우리들을 키웠다. 것보다도 엄마의 경우에는 힘들다는 표현이 필요 없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말썽을 피운다고 생각되면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를 분출하듯 분노를 여과 없이 자식들에게 뿜어냈고 집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먼지 떨이개를 아낌없이 활용하셨다. 그 먼지 떨이개를 몸으로 가장 많이 상대했던 이는 당연히 막내 녀석인 4번이었다.
나는 그러한 엄마의 행동들이 엄마의 고됨을 상쇄한다고 생각했다. 또 오만하게.
엄마는 여러 방면으로 상쇄를 잘하고 계셨다. 4번 녀석은 유별났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 4번은 '안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아도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행동을 해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서슴없이 내뱉어도. 할머니가 오냐오냐 하면서 돌본 어린 아들을 엄마가 건네어받았을 때에는 얘가 너무 자유 분방하여 품위 있는 모습으로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저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고 빠른 몸짓으로 먼지 떨이개를 향해 내달리셨다. 그런 엄마의 행동에도 나름의 융통성이 있었다. 엄마가 기분이 좋은 날은 덜 혼나고 기분이 나쁜 날에는 먼지 떨이개의 수술 부분이 허공을 향해 더 많이 펄럭거렸다.
엄마도 그런 당신의 모습에 지치셨는지 다른 방법으로 아이를 대하기 시작했다. 4번이 다른 아이를 때리고 오는 날에는 약국에서 연고를 사다가 그 아이 엄마에게 던져주며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끝이었다. 것도 '애가 뭐 그럴 수 있지요.'라는 의미를 담은 듯한 웃음을 지으며. 뭔가 아이 때문에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엄마는 매번 뭐가 웃기는지 상대에게 웃으면서 사과를 했다. 슈퍼에서 맘대로 과자며 하드를 꺼내먹는 아이를 위해 애가 뭐를 집어가면 달아 놓았다가 나중에 얘기해 달라고 당당하게 슈퍼 주인에게 얘기했다. 슈퍼는 4번의 전용 팬트리였다.
4번으로 인해 특별히 골치 썩을 일이 아니라면 그날은 무사한 날이었다. 그 한 녀석으로 인해 화가 나신 엄마의 입에서는 애새끼에서 애새끼들로 속썩임의 주체가 단수에서 복수로 바뀌며 가만히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나에게도 불똥이 날아왔다. 그런 4번이 학교에 입학한 후 그나마 엄마의 낮 시간은 한껏 여유로워졌고 가슴속 앙금으로 남아 있던 엄마의 시어머니도 집에 계시지 않았다.
엄마는 옥상에서 다 마른빨래를 걷어 가슴에 안고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옆집 마당도 그날은 한가로워서 기분이 좋았다. 계단에 서서 무심코 저만치 동네로 들어오는 길을 바라보았다. 4번 녀석이 걸어오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오는 것을 본 엄마는 아들에게 먹일 간식을 챙기러 부지런히 1층으로 내려갔다. 4번이 제일 좋아하는 과일은 참외였는데 마침 참외철이 시작되었다. 참외는 이미 냉장고에 그득했다. 엄마는 현관을 들어오면서 빨래를 거실에 휙 던지고 자리에 앉아 빨래를 개기 시작했다. 빨래를 갠 후 한쪽에 밀어놓고 부엌으로 갔다. 참외를 꺼내어 빠른 손길로 참외를 깎았다. 껍질을 다 벗기고는 습관적으로 참외 한쪽을 쓱 베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거리면서 나머지를 깎아 접시에 담았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윽고 현관문이 열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4번이 들어오는데 뒤에는 4번의 선생님이 따라 들어왔다. 엄마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이 녀석이 또 못된 짓 한 거 아니야? 반 친구를 때렸나? 동네 엄마들이야 만만하니까 가서 편하게 미안하다고 했는데 맞은 애 엄마가 콧대 높은 엄마면 어떡하지? 이럴 때는 그 노인네가 있어야 하는데 하필 안 계시네. 지수 우유 사건 때도 노인네가 따라가는 바람에 내가 망신을 면했는데 이번에는 어쩌지? 어쩌지? 선생님까지 오신 걸 보면 녀석이 뭔가 크게 잘못한 게 맞아.'
그 몇 초동안 온갖 생각이 엄마의 머리를 스친다. 4번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의 머리 윗부분에는 아이 손바닥 만한 크기로 거즈가 붙어 있었고 피도 살짝 맺혀 있었다.
'저건 뭐지? 우리 애가 저렇게 다친 거면 상대 아이는 엄청나게 다쳤다는 건가? 이 사단을 어쩌면 좋아? 지수 아빠한테 빨리 전화해봐야 하나 봐.'
엄마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손에는 참외가 담긴 접시를 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엄마는 얼떨떨해하며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말끔하게 정장으로 차려입은 젊은 여자 선생님은 4번을 따라 거실로 들어오더니 살짝 고개를 숙여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갑자기 거실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는 어리둥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죄송합니다."
4번 선생님의 첫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