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멜로디언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8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8
할머니는 절대 내게 너그러운 분이 아니셨다. 조금만 잘못해도 불같이 화를 내시고 욕을 별명 부르듯 했다. 아마 이름보다도 그 소리를 더 많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시원한 가을날이었다. 슈퍼 앞에서 할아버지들이 윷놀이를 하고 있었다. 막걸리를 마시며 윷놀이를 하는 소리는 온 동네를 떠들썩하게 했다. 동네에 그렇게 많은 할아버지들이 살았었나 다시 생각해 보면 대다수가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아니었을 거라는 추측이 든다. 그분들이 순수하게 윷놀이를 한 건지 돈을 걸고 내기를 한 건지 그것도 정확히 모르겠다. 분명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신 분들일 텐데 마치 그런 어두웠던 시절을 몰랐던 사람들처럼 윷이 특정한 모양을 갖추었을 때 환호를 하는 모습이 아이들처럼 순수하게 보였다.
나는 우리 집 건너편에 그늘진 턱에 앉아서 멜로디언을 불고 있었다. 입으로는 열심히 바람을 불러 넣으며 건반과 막내 녀석을 번갈아 보느라 눈은 위로 떴다 아래로 떴다를 반복했다.
할아버지들의 환호성 소리에 내 멜로디언 소리가 묻히는 듯했다. 하드를 손에 든 어린 막내 녀석은 동네 형들을 따라 뛰어다니며 신이 났다. 아직 아장아장 걷는 녀석이 저보다 큰 아이들을 따라 뛰다가 휘청거리기라도 하면 마우스피스를 물고 있던 내 입과 눈은 얼음이 되었다.
녀석이 넘어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눈에는 레이저를 쏘는 것처럼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다칠까 봐 걱정을 했다기보다는 녀석이 다치면 엄마든 할머니든 나에게 욕지기가 날아오기 때문에 녀석은 다치치 말아야 했다.
한창 멜로디언 연습을 하고 있는 내게 한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무리에 있던 그 할아버지는 한눈에 봐도 술에 취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벌게져서 눈은 풀리고 비틀거리지는 않았지만 걷는 자세가 불안정했다. 나는 그 할아버지가 정말 내게로 오는 건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분명 할아버지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내 앞서 서서 손을 쭉 뻗었다. 나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바라보았다. 할아버지한테는 역겨운 술냄새가 풍겼다. 입에서는 더한 냄새가 풍길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바닥을 펄럭이며 멜로디언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무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멜로디언으로 무얼 하려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어느새 내 옆에 자연스럽게 앉아서 멜로디언을 건네받았다. 거의 뺏어 가다시피 가져간 멜로디언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내가 물고 있던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저 멜로디언은 이제 버려야 할까 봐.'
할아버지는 무슨 근사한 곡이라도 연주를 할 것처럼 손가락은 건반에 대고 연습을 하는 척을 했다. 그러더니 마우스피스에 힘껏 바람을 불어넣었다. 나는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더 찌푸리고 코를 움켜쥐었다.
'나는 이제 죽었다. 멜로디언 버렸다고 맞아 죽겠다.'
그런 중에도 나는 할아버지가 무슨 곡을 연주하시나 집중하여 들었다. 할아버지는 제대로 된 음을 구사하며 어떤 곡을 연주했다. 나는 처음 듣는 곡이었다. 하지만 특정 곡을 음정에 맞게 연주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 무서운 할아버지에게 이게 무슨 곡인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코를 움켜쥔 채 건반을 빤히 바라보며 소리에 집중했다.
할아버지의 연세를 가늠해 보면 그분의 유년시절 및 청년시절은 일제강점기였다. 그 당시에 할아버지가 즐겨 듣던 노래였을까. 그분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니 그 곡은 어쩐지 짠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건반은 또 언제 다뤄보셨는지 다섯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사용하여 연주를 하는 모습은 그분에게서 풍기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코를 감싸 쥐고 할아버지의 멜로디언 연주를 감상했다.
한창 멜로디언 연주를 구경하고 있던 내 눈에 낯이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할머니가 시장에 갔다 돌아오셨다. 할머니는 벌써 돌아가는 모양을 한눈에 알아채시고는 바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하셨다. 아까 내가 동생을 볼 때 했던, 눈을 위로 떴다 아래로 떴다를 하셨는데 같은 행동을 하는데도 할머니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했다. 입으로는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입모양만 보고 단어 맞히기를 하듯 과장되게 벌어지는 할머니의 입모양을 나는 단번에 읽을 수 있었다.
[우. 라. 질. 년! ]
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손은 여전히 코를 잡은 채로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당신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아서 잠깐 성질이 누그러지는 듯했으나 그 성질이 어디로 갈까 싶었다.
나는 슬픈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연주하는 어느 할아버지의 곡을 묵묵히 감상해 주는 착한 어린이의 역할을 한 셈인데 할머니는 그저 멜로디언 때문에 화가 나셨다는 게 나는 더 화가 났다.
할머니는 막내 녀석의 손을 잡고 대문으로 사라졌다. 대문을 열 때까지도 입모양은 나를 향해 계속 특정 단어를 읊으셨다. 나는 할아버지한테서 멜로디언을 빼앗아 들었다. 입에서 마우스피스가 빠지면서 내 옷에 침이 튀었다. 방금 전까지 연주하셨던 곡이 아무리 좋아도 더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우리 집 대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