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한 대형 서점베스트셀러 진열대의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책을 읽고 망설이던 것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망해가는 회사에서 의미 없이 하루하루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사장은 매출을 제대로 못 올리고 급여일에서 며칠이 지나면 은행 대출을 받아 직원들에게 겨우 급여를 챙겨주었다. 나는 그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내 딴에는 일거리도 딱히 없는데 나라도 그만둬서 사장님의 부담을 줄여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장은 돈은 안 벌어 오면서 무엇이 그리 바쁜지 사무실에 붙어 있질 않았다. 나의 주된 업무인 전화업무도 어느새 뜸해져 전화의 코드가 제대로 꽂혀 있나 선을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가 물건을 주문하겠다고 했다. 어느 홈쇼핑 광고에 뜬 전화번호와 우리 사무실 전화번호가 비슷했던 것이다. 마지막 2개의 번호가 달랐는데 그 번호를 헷갈려서 바꿔 누르고는 아주머니들은 당당하게 물건을 주문했다. 나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 '아닙니다.' 하고 끊으려고 하면 상대방은 '웃겨'하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가끔 걸려오는 홈쇼핑 주문 전화를 받고 다시 눈치 안 보고 몇 시간씩 중고거래 사이트를 돌아다니거나 얼마 전 배우기 시작한 그래픽 관련 자격증 공부를 위해 프로그램을 열어 놓기도 했다. 마치 돈 받고 자유 시간을 만끽하러 온 사람처럼 나름 이 시간이 편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새로운 직장으로 간다면 물론 이런 식의 돈을 받고 노는 직장은 아닐 것이다. 한 동안은 일을 배우랴 막내 역할을 하랴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딜레마에 빠졌다. 사장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느냐 아니면 이곳에서 나름의 자기 계발을 하며 사장이 대출받아 맞춰준 급여를 챙기느냐..... 사실 내 급여 통장으로 들어오는 돈의 출처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직원이고 돈 주는 사람은 사장이니까 나는 제 때 월급만 받으면 그만이었다.
자격증 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래픽 관련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불법 복제물을 판매하는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제값을 준다면 엄두도 못 낼 다양한 소프트웨어가 한 장의 CD에 담겨 몇만 원에 거래가 되었다. 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요구했고 판매자는 많이 산다며 10프로를 할인해 주었다.
내 자리 오른쪽에 앉아 있던 이 과장은 그런 걸 돈을 주고 사냐고 물었다. 그의 말뜻에는 불법인지 아닌지가 핵심이 아니었다. 그런 것을 굳이 돈을 주고 사느냐였다. 원래 프로그램 업무를 하던 그에게는 그의 인맥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 설치 CD를 정품으로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기한테 말을 하지 그랬냐고 그랬으면 구해다가 줬을 거라고 했다. 나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많이 산다고 10프로 디씨까지 받았는걸요."
하루종일 시간을 때우기에는 홈쇼핑 아줌마 전화받기, 중고 거래 사이트 구경하기, 그래픽 자격증 공부하기 외에도 더 할 일이 필요했다. 나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된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였다. 글자수도 많지 않고 두껍지도 않은 책에 과연 무엇이 쓰여있을까, 왜 그렇게 사람들이 열광을 할까 궁금해서 전날 서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사무실에는 김대리와 대학생 알바생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있었다. 김대리는 키 190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로 식사를 할 때는 당연하듯 곱빼기를 시켰다. 그와는 몇 달 전 껄끄러운 사건이 있었는데그것이이 회사에서 빨리 발을 빼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나는 입이 심심할 때마다 마시려고 작은 꿀병을 가져와서 내 서랍에 넣어 놓았다. 기껏해야 하루 두 잔 어른 숟가락으로 2숟가락 정도를 먹는데 어느 날 꿀이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손을 대기가 꺼려졌다. 누가 내 꿀을 옮겼을까 생각하며 다음날 다시 뚜껑을 열었을 때 전날보다 더 줄어든 꿀을 보고 내 입에서는 얕은 한숨이 나왔다. 이런 짓을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내가 퇴근을 한 후에도 사장과 나머지 직원들은 뭔가 새로운 사업 구상을 하며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김대리는 배가 고팠을 것이다. 종이컵의 믹스커피를 짬뽕 국물을 넘기듯 후루룩 거리며 마시는 김대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덕분에 나는 두 잔정도 마시던 그 맛있는 믹스커피를 한잔으로 줄이기도 했다.
"김대리님 혹시 꿀 드셨어요?"
나는 내 꿀병을 흔들어 보였다. 김대리는 약간 무안해하며 "아...... 네......" 했다.
"그럼 이거 다 드세요."
나는 선심 쓰듯 꿀병을 건넸다. 숟가락따위는 없는 이 사무실에서 이 꿀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그의 목구멍을 지나 기름기 가득할 그의 뱃속에 들어갔을까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그것을 내 서랍 속에 계속 놔두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았다.
알바생은 혼자 바쁜 용무가 있는 것처럼 컴퓨터에 푹 빠져 무언가를 자세히 보는 듯했다가 타이핑을 치기도 했다. 저 알바생도 생각이 있다면 나와 함께 사장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방향을 고민해야 했다. 내 자리 맞은편에는 김대리가 앉아있었다. 그를 보며 그 꿀은 얼마 만에 바닥이 났을까 생각한다.
"제 출생이 좀 특이해요."
김대리는 나와 단둘이 있을 때 자신의 엄청난 출생의 비밀을 털어놓듯 말했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지금 연세가 100살이 넘으세요."
삼십 대 중반의 김대리에게 100살의 아버지라니. 그럼 엄마는 몇 살일까.
"김대리님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 읽어 보셨어요? 내용이 너무 좋더라고요."
김대리는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었고 또 그에 걸맞게 그 책을 이미 읽은 상태였다. 김대리와 나는 책 내용에 대해 토론하듯 수다를 떨며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갑자기 옆에서 듣던 알바생이 쓰러질 듯 웃어댔다. 나와 김대리는 저놈이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무슨 책 제목이 그래요?"
"네?"
"책 제목이 너무 황당하잖아요."
알바생은 마지막까지 웃음을 짜내듯 낄낄거렸다. 나는 되물었다.
"책 제목이 왜요?"
"아니 그걸 왜 옮겨요?"
왜 옮기다니, 치즈같은 건 옮기면 안 된다고 작가에게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하나.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김대리와 나와 헛웃음을 지었다. 알바생은 황당한 책에 대해 진지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 소리쳤다.
"치질을 왜 옮겨요? 치질을!"
조금만 곁들이면 고급 음식으로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식재료의 이름이 갑자기 초성만 같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그 흔한 베스트셀러 책의 제목을 코미디로 만들어버린 알바생은 얼마 안 가 사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직원 1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