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맞아 단편 소설 오디오북을 몇 편을 들었습니다. 한 소설 속 내용 중에 주인공이 연극 공연을 관람하던 중 무대 위 배우와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문득 너무나 갑작스럽게 오래전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인가 2학년 때쯤 됐으니까 연도로는 1990년대 초반이었었던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당시 무용 과목이 있었는데 겨울 방학 숙제가 좀 독특했습니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관람하고 그 티켓을 제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상문도 아니고 <관람 티켓을 제출하기> 지금 생각해도 좀 특이한 과제라고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쉬운 숙제 같기도 하고 제게는 한편으로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엄마는 항상 바쁘셔서 나와 공연 관람 같은 것을 위해 시간을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 누구도 '뭐 보라 가자'라며 연락을 해오는 일도 없었죠. 아마 주요 과목도 아니고 친구들 대다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숙제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내가 연극 관람 숙제를 할 수 있게 됐다며 사촌 언니와 함께 가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한 동네에 있던 큰집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언니에게 제 얘기를 하셨던 모양이었습니다. 언니는 나보다 열두 살이 많은 띠동갑입니다. 사촌 언니이긴 하지만 거의 막내 이모 뻘이어서 그야말로 그냥 어려운 큰 언니였죠.
언니와 함께 연극 공연을 보러 가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보기로 한 연극은 서울 명동에 있는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한 연극이었습니다. 이 글을 쓰려고 연극의 내용이 뭐였나 생각했는데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더군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제목조차 떠오르지 않습니다.
당시 일기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운 좋게 내 안의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날의 언니와 봤던 연극의 제목은 영영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뭔가 기억해 내고 싶은 것이 기억나지 않을 때 이렇게 답답하고 괴로운 것인지 오랜만에 이런 힘든 감정을 느껴봤습니다.
내가 연극을 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구와 어디에 갔던 기억 정도는 나는 것 같습니다.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횟수이니 제목 정도는 대충 머릿속에 되뇔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언니와 지하철을 타고 명동으로 향했습니다. 그날이 주말인지 평일 인지도 희미하네요. 그곳은 항상 사람이 많은 곳이어서 그날도 길에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회상됩니다. 내가 14, 15살 정도였으니까 언니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 되었겠네요. 당시엔 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었는지도 가물가물 합니다. 언니가 내 숙제를 위해서 시간을 내준 것에 대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고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니와 명동 거리를 걷는 기분은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남들이 보기에 꼭 젊은 엄마 정도로 착각할 수 있는 여성과 서울 번화가를 걷는 것은 저로서는 즐거운 첫 경험이었죠.
언니는 결혼을 늦게 한 편이 아니어서 그 일이 있은 후 머지않은 시기에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는 그 극장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정말 나를 위해 그 극장과 연극을 알아본 것인지 의아한 일이었죠. 언니 남자 친구와 같이 가본 곳이었나? 아니면 당시 데이트 중이었던 지금의 형부와 가보고 싶어서 미리 물색을 했던 걸까? 흥미로운 상상을 해봅니다.
연극의 제목과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나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연극 시간보다 일찍 극장에 도착한 우리는 극장 관계자의 '아직 입장 시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근처 햄버거 가게로 향했습니다.
남녀 간 데이트도 아니고 언니와 함께 방학 숙제를 하러 간 것이기에 나는 집에서 밥을 먹고 나온 터였습니다. 언니는 자연스럽게 햄버거 가게에 가서 저더러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고는 함께 햄버거와 콜라를 시켜 맛있게 먹었습니다. 부지런히 햄버거를 먹고 우리는 다시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근데 또다시 '아직 공연이 시작되려면 시간이 남았다'라는 말을 듣고는 극장에서 나와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습니다. 달달한 음료수를 마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 같이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둘이 앉아서 스마트폰을 보며 시간을 때웠을 텐데 후다닥 먹을 것을 먹고 가게에서 나오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음료를 마시고 다시 극장으로 갔습니다. 근데 '아직 연극 시작 시간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언니와 나는 또다시 거리로 나와 새로운 '먹을 곳'으로 향했습니다.
쌀쌀한 겨울 공기를 쐬며 언니를 따라 길을 걷는 동안 나는 생각을 했죠.
'언니가 이래서 살이 찐 거구나......'
언니는 20대 아가씨 치고는 제법 뚱뚱한 편에 속했습니다. 예순이 다 되신 지금은 오히려 날씬하고 세련되고 예쁜데 그 당시에 언니는 결혼식을 앞두고 살을 빼기 위해 어지간히 노력을 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살은 빠지지 않은 채 뚱뚱한 신부로 결혼식을 장식했습니다. 대부분 중년의 여자들은 아가씨적이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며 '이때는 예뻤지'하겠지만 언니는 아마 반대의 경우일 겁니다. 그 예쁜 결혼식 사진을 장롱 깊숙이 정말 '누가 볼까 봐' 꽁꽁 숨겨놨겠죠.
사실 언니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맛집 탐방을 하고 싶었는데 혹시나 공연장에 늦을까 봐 왔다 갔다 하며 확인을 한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드디어 연극을 관람하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그날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맨 앞자리는 아니었지만 내 앞에는 관객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앞쪽이라서 배우들과의 거리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죠. 잘 생기고 예쁜 배우들이 나와서 연기를 하는 것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연극 공연이라 참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연극이 한창 진행되면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남자 배우가 객석을 향해 바라보고 연기를 할 때 종종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겁니다. 그 배우가 대사를 하는 순간이 아닐 때면 나를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습니다. 나도 그 배우를 빤히 쳐다보며 눈 맞춤을 했습니다. 나는 잘생긴 배우와 눈이 마주친 것이 나름 기분이 좋았습니다.
꼭 TV 속 잘생긴 연예인이 브라운관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랄까요? 어린이 연극도 아닌데 객석에 웬 아이가 앉아 있어서 그 배우는 신기했던 걸까요. 아님 옆에 꽤 젊어 보이는 여성이 저 아이의 엄마일까 이모 일까 궁금해한 것일까요? 나는 무대에서 공연을 하는 배우가 멋있어서 보고 있는데 그 배우는 마치 나와 언니가 신기해서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배우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너무 설레어서 어느새 연극의 내용은 뒷전으로 한 채 난 그 배우가 무대로 나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글을 쓰면서 그날의 일을 새록새록 떠올렸습니다. 그 배우들은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연극 무대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실까. 당시 20대 초반이라고 쳐도 지금은 최소 50대 중반 이상이 되셨을 겁니다. 이미 내가 본 영화나 드라마에 나온 배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죠.
10여 년 전 엄마는 언니가 노래 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연극을 보러 간 그날 나를 위해 시간을 낸 것이 의아했던 것만큼 언니의 새로운 직업은 또한 나를 의아하게 했습니다. 언니의 노래를 직접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노래를 제법 잘하나 봅니다. 노래를 잘하니까 언니는 예술적 감각도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언니는 미혼 시절 특별히 직장 생활을 하진 않았는데 항상 큰집에 가면 소위 언니의 금손을 거친갖가지 공예품이 거실 한쪽에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그 극장에서 언니는 분명 나와는 다르게 깊은 감정에 빠져 내 옆에서 진지하게 연극을 감상하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언니가 정말 보고 싶은 연극이었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던 차에 '사촌 동생의 방학 숙제'는 언니의 예술적 감수성을 채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죠.
잘 생긴 배우가 나를 쳐다보는 것에만 푹 빠져 그 배우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동안 언니는 심오한 생각을 하며 연극의 내용이나 배우의 발성 그리고 무대 위 조명까지 두루두루 추억 저편에 담고 있었을 겁니다. 나는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 그날의 연극을 언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는 반가운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언니를 만나면 그날 우리가 본 연극 제목이 뭐였는지 언니한테 한번 물어봐야겠습니다.
벌써 오래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명동의 엘칸토 예술극장. 그곳은 그렇게 이름만큼이나 멋지고 웅장하게 내 가슴속에 새겨진 추억의 공간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