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금 전 입금 후

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15

by 쓰는수 이지수

예측하건대 나의 엄마나 그 윗대인 외할머니는 아이를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막내 이모의 아이들은 직장일로 바쁜 그들의 엄마를 대신해 할머니가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이모가 직장에서 야근을 한다거나 출장을 갈 때 그 집의 아이들을 놀이방에서 데려와 씻기고 먹이는 일을 할머니가 담당하셨다. 우리 집에 놀러 오시는 때에도 시장에 들러 막내딸이 낳은 손주들의 옷을 고르느라 바쁘셨다.






할머니의 본성으로 손주들을 예뻐하다가도 순간 잠재되어 있던 성질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놀이방에서 일찍 나와 할머니와 집에 온 손주는 함께 곤히 낮잠에 빠져 들었다. 한참 잘 자던 아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마침내 엄마 젖을 빠는 꿈을 꾸는 듯 할머니의 볼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가 다 자라 힘을 주어 물면 제법 아팠다. 할머니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손주의 작은 볼을 손뚜껑 같은 손으로 후려쳤다. 맵고도 매운 훈육이었다.





"할머니가 자다가 놀래서 냅다 싸다구를 날렸단다."

엄마는 그 일을 얘기하며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즐거운 일을 떠올리듯 눈물을 찔끔거리며 웃었다.





사건이 일어난 때가 나는 이미 20대였는데 문득 어릴 적 친구들과 놀다 집에 돌아가면 항상 집에 계시는 엄마에게 눈물이 나도록 감사했다. 비록 엄마와 낮잠을 자는 척하다가 몰래 문을 열고 뛰쳐나가 결국에는 파출소로 향하는 일탈을 저지르곤 했지만 할머니의 매운 손맛을 볼일이 없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거의 조카뻘 되는 사촌 동생이 그때 무언가 맛있게 먹는 꿈이라도 꿨으면 어쩔뻔했나 눈앞이 아련해진다. 그 매운 싸다구를 맞은 아이는 볼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겠다는 열망을 안고 자란 듯 훗날 소방관이 되었다.





[아이 다루기의 달인!]

어느 학부모가 써준 수업 후 평가 문구였다. 나는 이 평가를 누가 써준 것인지 알고 싶었다. 회사에서는 안 좋은 평가를 한 학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고 그 아이의 수업 중에는 더욱 주의할 것을 교사에게 요구한다. 긍정의 표시를 하는 고객은 그러려니 넘어가고 조금이라도 불만을 내색하는 고객은 더욱 신경 써야 했다. 나는 좋은 평가를 준 학부모에게 아니 그 아이에게 더욱 많은 에너지를 쏟고 싶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격으로 까다로운 고객을 더 신경 쓰라는 회사의 방침에 반기를 들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 메시지의 주인이 누굴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졸려워서 눈꺼풀이 천근만근인데도 억지로 패드 앞에 앉아 있다가, 눈이 제대로 감기면 '야!' 하고 누군가 버럭 하는 소리에 놀라 깨던 A인가? 수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제 갈길 가겠다는 듯 왔다 갔다 하면 엄마가 카메라의 방향을 이동하여 자신에게 맞추게 하던 B인가? 몸이 좋지 않다면서도 내 출석률 점수가 걱정이라도 된 것처럼 굳이 수업에 들어와서 수업 내내 잔뜩 얼굴을 찡그리고 앉아 있던 C인가? 이미지 자료가 부족하여 금방 본 이미지와 관련된 경험이나 근황을 물어보며 상냥한 척 질질 끄는 수업을 들어주었던 D인가? 공주마냥 꾸미고 수업에 들어왔길래 '아무개 프린세스~'라고 호들갑스럽게 호칭하며 띄어주었던 E인가?






F의 수업이 시작되었다. 화면이 켜졌을 때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는 아기 F가 등장했다. 나도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예전에 업무 규칙을 어겨 계약 해지를 하게 된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목이 말라 맥주를 마시며 수업을 진행했다는 그 동료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상황이었다. 좀 전에 박카스 한 병을 마시고 의자에 앉는 것을 깜빡한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고 목소리 톤을 올렸다.

"우리 ㅇㅇ이 오늘 안 좋은 일 있었어? 알 유 쎄드?"

나는 얼굴 근육을 한껏 활용하여 걱정스러운 표정을 연출한다. 아이는 계속 운다.

"ㅇㅇ아 오늘은 어떤 그림, 어떤 글자 나오나 한번 볼까? 어머어머 이것 좀 봐! 여기는 어딜까? 왓츠 디스 플레이스?"

다행히도 그림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물이나 장난감 종류가 나왔다. 아이는 까다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설마 그 아이의 엄마가 평가를 준 것인가. 나는 잠시 회상에 빠졌다.








순간의 기지를 발휘하여 '내가 아이를 좀 다루나?'라고 잠시 착각한 적이 있긴 있었다. 어느 초등학교의 방과 후 교실 미술 강사로 일할 때 아이들에게 스케치북을 나눠주다가 작은 소란이 일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남자아이들은 파란색 스케치북을 여자 아이들은 분홍색 스케치북을 나눠가졌다. 한 여자 아이가 마지막 하나 남은 파란색 스케치북을 받아 들고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 스케치북을 펼쳐 한 장을 부욱 뜯었다. 스프링에 묶여 있어 지저분해진 부분을 가위로 재빠르게 오리고는 아이에게 건네주며 나는 말했다.

"이제 이거 남자 거 아니야."

아이는 남자 스케치북도 여자 스케치북도 아닌 하얀 도화지를 받아 들고 울음을 그쳤다.








'통장에 돈 들어온 날이었겠지.'

나는 팀장이 보내준 그 평가 문구 목록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업무의 일부분이라고 여기며 했던 의식적 행위들이 쌓이고 쌓이더니 어느새 익숙한 루틴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루틴은 내 머릿속을 조정하듯 '나는 아이들이 좋다'라고 종종 세뇌까지 하고 있다.






나는 결혼 전부터 누가 물으면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왠지 그게 더 도시적이고 세련돼 보인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세월이 흘러 내가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리라고는 예상치도 않았다.




'입금 전 입금 후 효과일 거야.'

다시 한번 나는 할머니와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내 몸속의 DNA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되뇐다.




그리고는 단순한 숫자들의 위력이라고 치부하며 카메라 앞에서 아에이오우를 하며 얼굴근육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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