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낀 감정은 내 것이 아니었다_20
스마트폰을 갖게 된 노인은 그때부터 손님이 없어도 졸지 않았다. 유튜브라는 신세계를 알게 된 이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더니 그 속에서 덕담을 해주는 법륜 스님의 팬이 되었다. 식구들은 모두 언제까지 손님도 없는 가게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거냐고, 차라리 세를 받는 게 낫다며 핀잔을 주었는데 노인은 그때마다 올해만 하고 가게를 접을 거라고 했다. 그 말은 10년째 이어지고 있다.
'올해만'이라는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었다. 노인이 팔고 있는 물건들은 연말을 일주일 정도 앞둔 크리스마스가 대목인 상품이었다.
나는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며 웃고 있는 노인을 보며 문을 열었다. 문에서 딸랑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안에 있던 노인은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반쯤 들고 외쳤다.
"어서오! 아...... 니 왔나?"
아버지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 아빠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집에서 놀면 뭐 하나?"
"차라리 세를 받으면서 노는 게 낫지! 손님도 없는데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오늘 개시는 한 거예요?"
얼마 전까지는 개시를 몇 시에 했는지를 물었는데 이제는 개시를 했냐 못했냐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팔고 있는 제품은 그 연세의 어르신이 팔기에는 퍽 어울리지 않았다.
국민학교 때 엄마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간 나는 아버지 가게에 들렀다. 낡은 tv를 보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신이 나서 들어오셨다.
"사장님! 이것 좀 보세요! 끝내줍니다!"
아저씨는 품에 들고 있는 것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핫도~그! 핫도~그"
핫도그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게를 휘젓고 다닌다.
두 남자 어른은 예쁜 아가씨를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핫도그 트럭을 보았다.
"진짜 잘 만들었죠? 아이들이 좋아하겠죠?"
아버지는 대답하셨다.
"차가 예쁘네요."
"사장님, 열 개만 놓고 갈까요?"
아버지를 볼 때마다 그놈의 '올해만'이라는 말에 응수하는 나의 레퍼토리는 지겹도록 이어졌다. 나는 하필 이 가게가 아버지 소유의 가게라서 저렇게 70이 넘는 연세에 허송세월하며 시간을 때우게 된 것은 아닌가 하고 궤변의 논리를 펼친다. 세를 내는 경우였다면 그 부담감에 진작에 문을 닫었을 가게였다. 연세가 저렇게 드시도록 그 긴 시간 동안 손님도 오지 않는 가게를 지키며 법륜스님의 유튜브를 보고 있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저렇게 본인의 가게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의미 없이 시장에 나와서 가게를 본인의 전용 경로당처럼 활용하고 있는 저 모습은 흡사! <국내 최고령 장난감 장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기로 작정을 한 게 분명하다.
"아빠. 내가 아기 엄마라면 할아버지가 주인장으로 있는 가게에는 안 와요."
나는 나름 충격요법이라고 생각한 발언을 내뱉는 짓까지 해보았다. 아버지가 예전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할 무렵 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받은 것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며 '내가 그래 늙어 보이나?'라며 묻기도 하셨다. 하지만 이미 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손님 같은 건 안중에도 없고 오늘 법륜스님의 조언은 무엇인지 들으려고 가게에 나오는 것뿐이었다.
몇 년 전 아버지는 가게를 정리할 뻔한 일이 생겼다. 남들 한 번쯤은 걸려본다는 코로나에 부모님 모두 걸리셨다. 격리시설로 옮기신 두 분은 50여 년 만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노인네 코로나 한번 걸리면 체력 확 떨어질 텐데, 아빠 이 참에 가게 진짜 접었으면 좋겠다."
"언니는 무슨! 격리 시절에서 나오면 바로 크리스마스 대목 보려고 벼르고 있더만!"
"뭐? 가게 온 손님한테 죄다 코로나 옮길 일 있어!"
말을 하고 보니 아차 싶었다. 손님도 안 오는데 괜한 걱정을 미리 하는 모습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젊은 시절 건강했던 아버지는 격리 시설에 계시는 동안 병세가 심해졌고 호흡이 불편하다며 급히 병원 응급실로 이송이 되셨다. 식구들은 아버지에게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고 마음을 졸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정말 아빠 돌아가시면서 가게 문 닫게 되는 거 아니야?'
나는 어릴 적에 아버지가 장난감 장사를 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했다. 세상 아이들이 좋아할 장난감이 나에게는 그저 허구한 날 보아서 뜨뜻미지근한 흥미 없는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버지 가게에 가면 사방 벽면으로 장난감이 가득 차있고 집의 지하실에도 베란다에도 장난감과 어린이 용품이 가득했다. 이따금씩 아버지가 인형을 선물로 주시긴 했지만 그것은 중국집 딸내미에게 외식이라며 다른 중국집에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기억 속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은 최악이었다. 평범한 날보다 더 못한 날이 그 두 특별한 날이었다. 그날엔 손님들이 미어터지듯이 가게로 몰려오고 새벽 2시가 넘도록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나와 동생들은 집에서 서 저녁을 차려 먹고 TV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어느 날은 한참 잠을 자다가 인기척 아니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에 눈을 뜨니 도둑고양이가 집에 들어와 어슬렁거렸다. 나는 놀라서 비명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엄마아빠를 기다렸지만 그들은 오지 않았다. 손님이 늦게까지 계속 가게를 찾으면 나는 더 긴 시간 동안 엄마아빠가 없는 집에서 어른 노릇을 해야 했다. 그 특별하고 행복한 날 우리 집에는 어른이 없었다. 나는 아빠가 장난감이 아닌 다른 것을 팔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를 기다렸다.
"난 아빠가 왜 계속 가게에 나가는지 알 거 같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그 이유가 뭔데? "
"평생 해오신 일이잖아. 아빠는 변화를 싫어하잖아. 변화가 두려우신 거지. 가게를 접는다는 것은 아빠에게 엄청난 변화인 거야. 진짜 가게를 정리한다면 오히려 우울해서 병이 나실 수도 있을걸. 난 그냥 손님이 오건 안 오건 개시를 하건 공을 치건 그냥 하시고 싶은 대로 하셨으면 해. 그리고 니 딸내미는 아직 장난감 가지고 놀 때니까 걔 클 때까지 계속 장난감 가게 유지하시면 좋지 뭘 그래? 야! 애 유치원에서 올 시간 아니야? 그래 빨리 준비하고 나가봐."
다행히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회복이 되시고 격리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크리스마스 이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에 가게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쉬운 눈치셨다.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에 가게 문을 닫은 게 도대체 몇 년 만일까?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 두 분이 결혼도 하시기 전부터 장난감 장사를 하셨다. 그 시장에 네 개나 되던 장난감 가게는 어느 날 두 개로 줄었고, 시간이 흘러 그 두 가게가 신경전을 하듯 버티더니 결국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으셨다. 진정한 승리자였다.
50여 년 전 아버지가 큰아버지 밑에서 장사를 배우다가 독립을 결심했을 때 누군가 아버지에게 최초로 장난감 장사에 대해 운을 뗀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장사를 50년이 넘도록 지속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난 누군지도 모를 그 사람을 용서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