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속에는 메구미가 웃고 있었다. 하얀 치아에 돋보이는 덧니는 '니 일본여자야~'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디즈니랜드에서 찍었다던 그녀의 가족사진에는 엄마 아빠 그리고 여자 아이 셋과 막내로 보이는 꼬맹이 사내아이가 있었다. 나도 맏이였고 메구미도 맏이였다. 그녀의 부모님도 아들을 보기 위해 자식들을 낳은 것처럼 메구미의 형제관계는 내 경우처럼 딸딸딸아들이었다. 얼굴만 바꿔 놓으면 꼭 우리 집의 가족사진으로 써도 될 것 같았다. 다른 사진에는 푸르른 논이 가득한 모습이었는데 그녀는 그것을 'my garden'이라고 표현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녀가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오는 것은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고 이웃집에 마실을 갔을 때였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이웃집 여자의 책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 책은 표지가 아주 예뻤다. 분홍색 바탕에 고양이인지 인형인지 구분이 안 가는 것을 검은색 매직으로 직직 그어 색칠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책의 제목만 보고 독특한 판타지 소설인 줄 알았다. 오랜만에 판타지 소설에 한번 푹 빠져보고 싶은 마음에 그 책을 빌려오게 되었다. 일본 작가가 쓴 그 소설의 제목은 '검은 마법과 쿠페빵'이었다. 검은 마법이라는 표현도 그렇고 쿠페빵이라는 것도 어감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내 예상과 달리 소설은 판타지 소설이 아니었다. 그저 주인공 여자 아이의 좌충우돌 예측불허한 이야기였는데 그 책에는 내게 익숙한 한 도시가 나와서 오래전 기억으로 나를 인도하고 있었다.
"야, 굉장해! 우리 정말로 치바까지 가는 거야? 친구들하고 이렇게 멀리까지 가는 건 난생처음이야!" p80
아이들은 잔뜩 들떠서 치바로 놀러 가고 있었다. 우리로 치면 수도권 전철 노선의 끄트머리 역 촌동네 아이들이 지하철을 타고 서울 근처로 나들이를 가는 셈이었다. 내 눈길은 '치바'에서 잠시 멈췄다.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나는 책상 서랍의 한 구석에서 편지 뭉치들을 꺼냈다. 한 국제 우편의 봉투에 적힌 발신인의 주소를 확인했다.
[ 도가네시 치바현 283 ]
검은 마법과 쿠페빵은 어느새 나에게는 판타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IMF라는 것의 명칭을 국민 대다수가 배우기 몇 해 전, Korea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관제엽서에 또박또박 적던 그 소녀는 책상에 붙어 앉아 영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쓰고 있다는 말이 무색하도록 편지지에 쓰인 문장은 짜깁기의 근사한 결과물이었다.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나였다. 나는 그 소녀의 주소를 받아본 날 서점으로 향했다. 더 멋진 편지를 완성하기 위해 서점에서 구입한 영어 펜팔책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수록되어 있었다. 꼭 내 마음을 알고 책이 만들어진 것처럼. 나는 그것들을 단어 정도만 변경하여 편지에 옮겨 적으면 되었다.
'곤니찌와'
히라가나로 적은 나의 짧은 첫인사말은 그녀를 감동시킨 듯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니? 우리 일본어로 편지를 교환하지 않을래?
다음 편지에 나는 답변을 했다.
나는 일본어를 잘 몰라. 난 영어를 더 좋아해. 너도 영어를 공부해야 하잖아. 우리 영어로 편지를 교환하자.
사실 나는 영어를 좋아했다기 보단 영어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래서 다른 과목은 새책처럼 먼지만 쌓여가고 바닥을 치는 등수를 기록하는 동안 영어 공부는 취미처럼 놓지 않고 있었다. 내가 만약 일본어 선생님을 좋아했다면 그녀의 의견에 동의를 했을지도 모른다.
10대 소녀들의 관심사는 뻔했다.
우리나라에 지금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가 최고 인기가 있어. 춤도 잘 추고 노래가 엄청 좋아. 참! 엄정화라는 신인 가수가 나왔는데 노래도 잘하고 정말 미인이지. 너도 한번 들어봐.
나는 용돈을 아껴 산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와 엄정화 테이프 그리고 그들의 사진을 문방구에서 사서 소포에 동봉했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 되기 전 나는 소포를 부치기 위해 학교 근처의 우체국에 부지런히 달려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