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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Dec 20. 2023

이 짧은 시간 동안

메멘토 모리


눈이 내렸다 라고 말하면 웃을지도 모른다. 저기 강원도 산골에 내리는 폭설에 비하면 눈곱만큼 날릴 정도다. 적은 양의 눈이지만 길은 더 미끄럽다. 길 위에 살짝 뿌려진 눈 때문에 아침 출근길 사람들 발걸음이 더디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도 조심조심 발을 딛는다.


여고 동창회. 오늘 낮 12시에 수성관광호텔에서 어머니 동창회가 열린다.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으셨다.

"아이고, 어지간하면 같이 가자. 우리가 또 언제 볼 수 있겠노. 나는 니도 보고 싶고 다른 친구들도 보고 싶다. 인자 보믄 마지막 아니겠나."


다리가 불편한데다 눈까지 내려 엄두조차 내질 못하고 계셨다. 다른 일 같았으면 가지 말라고 말렸을 텐데, 여고 동창회라 하니 어떻게든 보내드리고 싶었다. 집앞까지 택시 불러서 타고, 돌아올 때도 택시 타면 되지 않겠냐고 권했다. 오전 강의 때문에 집을 나섰는데, 아마 어머니는 계속 고민을 하고 계실 거다.


감옥에서 두 달쯤 지났을 때 찜통 더위가 시작되었다. 에어컨에 익숙했던 나는 그 곳에서 보낼 여름이 두려웠다. 얼음물과 아이스커피만 입에 달고 살았던 나는 미지근한 물만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기가 질렸다. 시원한 물에 아침 저녁으로 샤워를 하던 나는 바가지로 겨우 몇 차례 몸에다 물을 뿌리는 정도로 참고 견디고 버텨야 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날이 온다. 나에게도, 어머니께도,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것은 어느 날 아침일 수도 있고, 점심을 먹은 직후일 수도 있고, 퇴근길일 수도 있다.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나와 나의 모든 세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 날.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팩트인데, 세상은 마치 누구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을 것처럼 돌아간다. 무엇 하나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고, 곁에 있는 사람 소중한 줄도 모르고, 내 입에서 튕겨져 나가는 온갖 험한 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줄도 모른다. 모든 것이 영원히 계속 될 것처럼 살다가 모든 것이 일순간 무너지는 때를 만나면, 우리는 그 때에야 비로소 눈물을 한 방울 흘리는 거다.


친구, 선후배, 가까운 친척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떠났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의 세상은 잠시 멈추었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나의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였다. 똑같은 세상인 것 같지만 똑같지 않았다. 누군가의 부재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든다. 나의 부재도 누군가에게는 다른 세상이 되는 의미 있는 사라짐이길 바란다.


상실은 아픔이다. 나도 언젠가 상실되어질 텐데. 먼저 사라진 이들은 남겨진 이들에게 슬픔을 주고, 남겨진 이들은 떠나는 이들에게 그리움이 된다. 우리, 지금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기껏해야 90년. 남은 시간은 그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곧 사라진다. 메멘토 모리!


더 가지려고 발악했었다. 내가 옳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싸웠다. 너는 틀렸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수치와 모욕을 주었다. 내가 가진 걸 지키기 위해 죽기 살기로 살았다. 최선을 다한 내 삶에 후회는 없지만, 결국은 모두 사라질 거란 현실 앞에 서면 대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용을 쓰며 살았는가 답답해진다. 


웃어도 되었는데.

괜찮다 해도 되었는데. 

손 좀 잡아줘도 되었을 텐데.


모두가 사라질 거라는 마땅한 현실을 앞에 두고 보면,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크게 밉지 않다. 어머니의 동창회가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길.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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