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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Jan 29. 2024

독감, 뒤통수, 다시 글쓰기

삶은 온통 행복이었다


지난 17일 밤 12시. 응급실에 가서 독감 확진 받았습니다. 어떻게 참았냐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그제야 온몸이 무너져내렸지요. 링거를 맞고 독한 약을 일주일치 받았습니다. 기침은 쉴 새가 없고 고열이 지속되었으며 오한과 근육통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1년 전 코로나에 걸렸을 때 죽는 줄 알았는데, 그때보다 열 배는 더 아픈 것 같았습니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고 갈수록 증상이 더하기만 했으며, 심지어 숨 쉬기조차 힘든 지경에 이르렀지요. 어쩌면 사람이 죽을 때 이렇게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면역력이 약해진 줄은 알았지만, 몸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한 줄 몰랐습니다. 운동도 하고 음식도 가려 건강 챙겨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강의와 각종 행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예정 대로 진행했습니다. 무리다 싶으면서도 수강생들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코칭했던 4명의 수강생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일어난 그들의 배신은 8년간 쌓아온 제 정신력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지요. 떠나는 건 자유입니다. 상처를 주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만의 바람일 뿐, 아마도 그들은 자기들만의 정당성을 주장하겠지요. 


회의를 느낍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매 순간 그토록 정성을 다하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묻는 질문마다 혼을 담아 대답했고, 문제와 고민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움 주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갈대와 같다 하지만, 어찌 그리 못됐게 등을 돌리는지 한숨만 나옵니다.


평소 같았으면 조금 덜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독감 때문에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뒤통수까지 맞고 나니까 사람이 너덜너덜해지더군요. 참으로 오랜만에, 거의 10년만에 '불행'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때로 인생이 우리를 세게 걷어차면 우리는 고꾸라진다. 하지만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나야만 하고, 또다시 걷어채여 쓰러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또다시 일어난다. 그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다." -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손가락 움직일 힘조차 없고, 글 쓰는 일 따위가 다 무슨 소용 있겠냐는 허무감에 빠져 종일 누워만 지냈습니다. 시련과 고난을 넘어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었는데, 몸과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지니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부정적인 생각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된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저도 감옥에 있을 때 글 쓰기 시작했으니 목적이 달랐다고 할 수 없지요. 뭔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책을 읽고, 행복하기 위해 글을 쓰고, 변화와 성장을 위해 자기계발을 합니다.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문득 깨닫게 되었지요. 이것이 바로 불행의 원인이구나.


독감에 걸렸기 때문에 불행하다 느끼는 이유는, 독감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는 저의 기준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뒤통수를 맞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사람은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저의 가치관 때문이었습니다. 


독감에 걸릴 수 있습니다. 뒤통수 맞을 수 있습니다.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바람이 불 수도 있고, 땅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세상과 사람은 늘 그럴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기준과 철학을 세워놓았다 해서 세상과 타인이 그 기준과 철하게 꼭 맞아 떨어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는 저만의 삶의 방식이 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지요. 독감이나 배신이 저를 불행하게 만든 게 아니라, 저 자신이 저를 궁지로 몰고 갔던 겁니다. 몸과 마음이 약해진 탓에 잠시나마 인생 진리와 법칙을 잊고 말았습니다. 


불행하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은 것은, 결국 행복할 때에만 글을 쓴다는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인생에는 행복보다 불행이 훨씬 많을 테니 결국 글 쓰는 삶도 별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지요. 틀렸습니다. 불행하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는 것도 틀렸고, 행복하기 때문에 글 쓴다는 말도 틀렸습니다.


행복하기 위해 책을 읽고, 행복하기 위해 운동을 하고, 행복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행복하기 위해 자기계발을 하는 것. 모두 틀렸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떤 일을 행하면 반드시 그 끝은 불행과 맞닿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행복한 상태에서 글을 써야 합니다. 행복한 마음으로 책을 읽고, 행복하게 운동하고, 행복한 상태로 자기계발을 해야 합니다. 무엇을 하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이미 행복한 상태로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독감에 걸려 불행한 게 아니라, 행복한 상태에서 기꺼이 독감을 앓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배신에 치를 떨 것이 아니라, 행복한 마음으로 그들을 기꺼이 보내주어야 합니다. 독감이 지나가면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테니 감사해야 하고, 나를 떠나는 그들과 잠시나마 기쁜 순간 보낼 수 있었으니 그것에 깊이 감사해야 하겠지요. 


말이 쉽지 사람 마음이 그렇게 되냐고 반문하는 경우 많은데요. 아닙니다. 쉽습니다. 누구나 지금 당장 가능합니다. 지금 행복하다 선언하면 됩니다. 매일 매 순간 무슨 문제와 고민이 있다며 푸념을 쏟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입으로 머리로 행복하다는 말을 뱉아내기만 하면 됩니다.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 대부분이 해 보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침이 멎지 않아 갈비뼈가 욱신거리는 와중에도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씁니다. 지금 이 순간 제 마음 너무나 행복해서 공중부양이라도 한 것 같습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뒤통수를 친 인간들 때문에 치를 떨었지만, 지금은 그들을 고이 보내드리고 제 마음 자유로워졌습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세상과 타인을 맞추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늘 제멋대로이고, 타인은 언제나 나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독감이 내 안에 훅 들어오고, 또 어느 맑은 날 믿었던 인간이 뒤에서 훅을 갈겨 올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비틀거리며 일어서야' 합니다. 그렇게 가까스로 일어서고 나면 '또다시 걷어채일' 테고요.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일어납니다.' 류시화 시인의 말처럼, 이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이지요. 아팠던 만큼 강해질 테고, 무너진 만큼 솟아오를 겁니다. 


몸과 마음에 생채기 가득합니다. 무너지면 상처가 되고, 일어서면 씨앗이 됩니다. 불행을 떠올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행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잠시 쓰러졌던 시간조차 후회하지 않습니다. 제 삶을 더욱 견고히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남은 삶에서 세상은 제게 또 다른 고통을 던져줄 것이고, 사람들은 제게 또 다른 아픔을 줄 테지요. 고통과 아픔 끝도 없이 이어지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랑과 축복과 감사가 쏟아진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건강을 염려해주는 수많은 이들. 덕분에 성장하고 있다며 진심어린 인사를 전해오는 사람들.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단 한 번의 흔들림 없이 곁을 지켜주는 자이언트 식구들. 삶이 통째로 행복이란 사실을 깨닫고, 저는 다시 글을 씁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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