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장이 Feb 29. 2024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내 탓이다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차를 타고 이동할 테니 비 맞을 일 없다는 단호함으로, 우리 셋은 우산 없이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까지 잠깐 스치는 비를 맞았다. 대구 상공회의소 앞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동안 아들은 비를 맞았다. 건물 뒷편으로 돌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동안 아내와 나는 비를 맞았다. 


시험 끝났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고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동안 비를 맞았다. 건물 입구에서 기다리던 아들이 상공회의소 앞에 세운 차에 오르는 동안 비를 맞았다. 


이시아폴리스에 위치한 중국집 '자미성' 인근에 차를 세우고 식당까지 이동하는 동안 우리 셋은 비를 맞았다. 점심을 먹고 난 후 다시 차가 있는 곳까지 걸으면서 더욱 굵어진 빗줄기를 우리는 고스란히 맞았다. 


동네 '올리브영'에 들으고 약국에서 판콜에이를 사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에도 비를 맞았다. '빅 마트'에 들러 대파와 숙주나물과 고사리를 사가지고 나오는 사이에도 비를 맞았다. 아파트 입구 정육점에 들러 국거리 두 근과 떡국에 넣을 꾸미장 한 근을 사면서도 비를 피할 수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 현관까지 이동하는 동안에도 비를 맞았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고 큰소리 쳤는데, 비는 많이 내렸다. 차를 가지고 이동할 테니 비 맞을 일 없다고 장담했는데, 우리는 비를 쫄딱 맞았다. 


우산 하나 챙겼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탓에 종일 비를 맞았고, 나는 머리가 띵했고, 코가 맹맹해졌으며, 어깨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독감 떨어진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냥 일어나는 일은 없다. 인생은 원인과 결과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날라갔어요." 파일이 무슨 새도 아니고. 컴퓨터가 무슨 터미네이터 인공지능도 아니고. 어쩜 그리 한결같이 '아무것도 안 했는데' 모조리 다 '날라갈' 수가 있을까. 


감옥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그들은 대한민국 헌법을 우습게 여긴다. 판사도 같잖게 여긴다. 자신은 감빵에 들어올 이유가 없다고 맨날 큰소리 친다. 나는 처음에, 감옥이란 곳이 억울한 사람 모아두는 곳인 줄 알았다. 


회사에서도, 막노동 현장에서도,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억울했고 분했으며 원통했고 답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인생이 그냥 '날라갔으니' 그 심정 오죽했겠는가. 


딱히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제법 잘 나가는 사람들 있다. 무슨 일이든 그가 하면 술술 풀리는 것 같아서 부럽기까지 하다. 그런 이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아! 내가 그리 해서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그들은 웃는다. 여유가 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 틀렸으면 고치면 되고, 막혔으면 뚫으면 되고, 실패했으면 다시 하면 된다. '내'가 한 일이니까 '내'가 바꿀 수 있다는 믿음. 그들의 삶이 잘 되는 이유다. 


비를 맞은 건 비 때문이 아니다. 비를 맞은 건 하늘 때문도 아니다. 비를 맞은 건 일기예보 탓도 아니고, 비를 맞은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은' 때문도 아니다. 비를 맞은 건 나 때문이다. 내가 우산을 챙기지 않은 탓이다.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다. 투덜거릴 일도 아니고 불평할 일도 아니다. 


기꺼이 감기 앓아야 한다. 내 탓이오! 약 먹고 따뜻한 물 마시며 반성하자. 다음부터는 비가 조금이라도 올 것 같으면 우산을 꼭 챙겨야지. 밤 9시부터 강의해야 한다. 사무실이 코앞이다. 우산 가지고 나가기 귀찮은데. 사람이 이렇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작가의 이전글 여유,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