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기 위해 쓴다

글 쓰는 삶

by 글장이


글을 쓴다는 건 기억에 기초합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그 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선명하게 떠오를수록 글 쓰기가 수월합니다. 초보 작가의 경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하소연하는 때가 종종 있는데요. 마음 느긋하게 가지고 사소한 것부터 하나하나 적다 보면 조금씩 생각이 날 거라고 조언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라도 더 생각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이렇게 기억해낸 뭔가를 글로 쓰면 더 오래 기억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삶의 조각을 찾고, 그 조각을 소중한 종이에 담아, 영원히 보관하는 과정.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할 수도 있겠지요.


<하이힐>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차승원씨가 주연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습니다. 성 정체성이 흔들린 남자가 자기 안에 숨겨진 여성성을 견디지 못해 더 폭력적이고 위험한 인생을 시도하는 장면들이 안타깝고 슬프기까지 합니다.


저는 글을 쓸 때도 이런 시도를 해 봅니다. 상처와 아픔이 있을 때, 그것을 잊기 위해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을 쓰는 것이지요. 부부싸움을 해서 속이 상할 때는 등산한 얘기를 씁니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머니 건강이 염려될 때는 성공이나 목표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고요. 실수나 실패를 한 경우에는 내가 어떤 사람이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크게 짚어 보는 글을 주로 씁니다.


생각은 꼬리를 무는 습성이 있습니다. 가슴 답답한 일이 생겼을 때 그 생각만 계속 하다 보면 점점 더 답답해집니다. 상처가 생겼을 때 계속 그 생각에 집중하면 점점 더 상처가 깊어집니다. 좋은 생각이야 얼마든지 꼬리를 물어도 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굳이 길게 끌고 갈 필요는 없겠지요.


글 쓰는 일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행위입니다. 전혀 다른 글감에 푹 빠져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상처에서 고름을 짜낸 듯 시린 가슴이 조금씩 낫기도 합니다.


고통을 직시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감정이 한창 뜨거울 땐 돌아갈 필요도 있습니다. 기억을 떠올려야 할 때도 있고, 가슴 한 쪽에 잠시 물려두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기억을 떠올려 죄다 쓰고 나면 가슴이 후련해질 때도 있습니다. 전혀 다른 내용의 글을 써서 잠시 아픔을 잊는 것이 도움이 될 때도 있고요. 그리운 사람의 이야기를 적으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을 때도 있고, 그 시절의 외로움과 상처가 덧나 괴로울 때도 있습니다.


글쓰기란 이런 도구입니다. 내 안에 잠든 모든 감정을 투명하게 마주할 수 있는. 그래서 나를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한없이 약한 존재임을 깨닫게도 하지요.


질주하며 살았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까맣게 잊고 살았지요. 어느 순간 감정이 북받쳐오르면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가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중요하지만, 자신을 안아주는 시간도 꼭 필요합니다.


나를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진정 위하는 법도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세상도 품을 수 있는 법이지요.


글을 써 본 경험이 부족한 사람이 처음으로 쓰기 시작하면 겉으로 보이는 감정에만 치우치게 됩니다. 공자님 말씀만 쓰는 거지요. 용기를 가져라, 희망을 가져라, 신념과 열정을 품어라, 절대 포기하지 마라, 아픔을 이겨내야 한다...... 실제로 자신은 하나도 할 수 없으면서 세상 사람들한테 꼰대같은 말만 전할 뿐입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내 안에 잠든 진짜 마음과 감정이 무엇인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이 시점에 주로 눈물이 흐릅니다. 내 자신이 기특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불쌍하고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이 모든 감정을 품고 나면, 비로소 덤덤한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팩트 위주의 삶을 적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지요. 마음은 갈수록 편안해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며,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평정심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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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기 위해 글을 씁니다. 나를 잊기 위해 글을 씁니다. 쓸 수 있어, 참 다행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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