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어 다행이다
두 달쯤 전의 일이다.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다가 갑자기 뭉클해졌다. 여덟 평짜리 좁은 원룸이라 딱히 몸을 감출 곳도 없었다. 화장실과 부엌이 맞닿은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펑펑 울었다.
나이 오십 넘은 남자가 혼자 글 쓰다가 아이처럼 우는 모습이 내게 참 어울리지 않는다 싶어 웃었다. 울다 웃었으니 똥구멍에 털이 났겠지. 어린 시절 똥구멍에 털 나는 노래로 놀리고 놀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다가 또 서럽고 서글퍼 오열했다.
그 날에는 어쩌면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글 쓰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웃다가 다시 울고. 한 시간쯤 울고 웃기를 반복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쓰던 글을 마무리지었다. 마지막에 이렇게 써다. "어쩌면 이렇게 평생 통증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매일 울고 웃으며 글 쓸 수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것으로 되었다."
책으로 낼 것도 아닌 글을 매일 쓰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고 누군가 물은 적 있다. 그 친구의 말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쓸모와 활용'에 넋을 빼앗겼다는 반증이었다.
뭘 배우든 써먹어야 하고, 무엇을 하든 돈이 되어야 하고, 누구를 만나든 일종의 거래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 많다. 그런 세상이다. 최초 나의 수업 이름은 <이은대의 글쓰기 수업>이었다. 수강생 모집하기 힘들었다. '책쓰기 수업'이라는 의미를 포함한 후로 등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글만' 쓰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자기 이름으로 책을 출간할 수 있다는 '쓸모와 활용'을 강조하고서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입과한 사람 중에는 책 출간을 미룬 채 글만 쓰겠다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글을 쓰면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과 느낌과 감정을 텍스트로 표현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끄집어내면서 '문자'라는 도구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사람의 경험이나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없다. 대략 비슷한 정도일 뿐.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화가 난 것인가. 섭섭한 것인가. 서운한가. 미운가. 질투인가. 시샘인가. 피곤할 뿐인가. 답답한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인가. 인간의 수만 가지 감정 상태를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있는 어휘가 없기 때문에, 무엇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표현인가 궁리하면서 글을 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나는 나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 글을 쓰다 갑자기 통곡을 한 것이 아픔인지 서러움인지 서글픔인지 회한인지 답답함인지 아쉬움인지 후회인지 괴로움인지. 나는 아직도 그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 모르는데도 내가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위로받았다.
글쓰기는 영혼과 연결되어 있다. 글을 잘 못 쓰겠다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에 닿지 못한 게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자신을 모르고,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신을 위로하지 않고, 자신을 챙기지 않고, 자신과 대화를 나누지 않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내 영혼에 닿을 수 있는가. 두 가지 방법뿐이다.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관심을 가지는 것. 그리고 글을 쓰는 것. 잘 쓰든 못 쓰든 글을 써야 한다는 결론이다.
살면서 최악이다 싶을 때마다 글 쓰면서 견디고 버텼다. 내게 견디고 버틸 만한 힘이 있다는 사실을 글 쓰면서 알았다. 내가 그런 존재라 감사했다. 다시 살아야겠다는 결심도 하게 됐다.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또 글을 쓴다. 내가 아는 나를 만나면 반갑고, 아직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면 기쁘다. 평생을 다른 사람 이해하느라 애쓰며 살았다. 이젠 나 좀 챙기려 한다. 나는 나에게 가장 미안하다. 쓸 수 있어 다행이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