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창을 통해 삶을 들여다보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라고 쓰기보다는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을 짝사랑했다"는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저는 누구도 자기 인생에 대한 글을 쓸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은 우주를 쓰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강의 시간에 종종 "어제 뭘 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수강생 한 명의 이름을 부르고 마이크를 켜게 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눕니다. 9년째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만, "어제 아침 눈 뜰 때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모조리 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어제 하루 매 순간 생각과 말과 행동과 사건이 존재했을 테지요. 그럼에도 무엇을 했느냐 질문하면 한두 가지 답변이 주를 이루곤 합니다. 가끔 시간 순서대로 줄줄 읊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중간 중간 빼먹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어제 하루조차 온전히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인생에 대한' 글을 쓸 수 있겠습니까. 긴 시간 중에 어느 특정한 단면을 떠올리고, 작은 창을 열어 그 순간을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글쓰기입니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초보작가의 하소연을 자주 듣는데요. 정말로 쓸 것이 없어서 고민하는 게 아닙니다. 무엇을 써도 되기 때문에 방황하는 것이죠. 작은 창을 열고 들여다보면 선명하게 보이지만, 광활한 벌판 위에 서 있으면 무엇에 초점 맞춰야 할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세 가지 보기를 제시하고 글 쓰라고 하면 다들 어느 정도는 씁니다. 그냥 마음 대로 자유롭게 제한없이 쓰라 하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게임을 하든지 음악을 듣든지 샤워를 하라고 하면 잘도 골라서 합니다. 자유시간이다 이러면 허공에 날리는 시간 많아집니다.
줄이고 좁혀야 합니다. 깊이 파고들어야 합니다. '인생을 써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어렵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고 궁리하고 설계해야 합니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시간 한참 걸립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해 한 번 적어 보세요. 대충이라도 빠르게 적을 수 있을 것이고, 쓰다 보면 점점 생각이 나서 분량도 많아질 겁니다. 졸업식이라는 하루짜리 기억을 구체적으로 쓰다 보면, 그 시절 '나'라는 존재의 사고방식이나 특징 등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선생님, 부모님, 친구들까지 그리운 사람들도 만날 수 있고요.
작은 창을 통해 '고등학교 졸업식' 장면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속에 인생도 있고 사람도 있고 습관도 있고 가치관도 있습니다. 기쁨도 있고 아픔도 있고 슬픔도 있고 섭섭함도 있고 애환도 있습니다. 단 하루짜리 창문 속에 말이죠.
덧붙이자면, 엄청난 일이 있었거나 특별한 기억만을 떠올리기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때 내가 그 일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는가. 그때 그 일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독자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떠올릴 겁니다. 간접 체험도 할 겁니다. 그러면서 작가의 철학과 가치관도 살펴보게 되지요. 공감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독자도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 사람 다 겪는 일, 아무것도 아니라 여겨지는 평범한 하루, 구름과 햇살과 여름과 가을. 이런 이야기 속에 나만의 느낌과 감정을 섞어 메시지와 연결하면 독자에게 참한 일상 선물을 전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인류에 대해 쓰지 말고 인간에 대해 쓰라고 했습니다. (E.H 화이트)
인생에 대해 쓰지 말고 '그때 그 일'에 대해 써야 합니다. (이은대)
작게, 좁게, 그리고 깊게.
어제와 오늘을 쓰는 것이 곧 삶을 쓰는 길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