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날의 어느 순간
중학교 3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에게 중학교 시절은 "있기는 있었지만 하나도 기억 나지 않는 시간"일 테지요.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을 내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3년 동안 사랑을 나눈 사람이 있는데, 어떠한 이유로 모든 기억을 잃었다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그 3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겁니다.
기억하지 못하면 내 인생이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볼 때는 "그래도 틀림없이 너의 인생이다!"라고 주장하겠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일 뿐이겠지요.
우리는 얼마나 많이 잊고 살아가는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와 고민들 때문에, 오래 전 분명 존재했던 아름답고 순수하고 소중한 순간들을 모조리 잊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 많습니다.
얼마 전, 사무실 천장 등 하나가 꺼져서 철물점에 다녀와 새로 끼운 적 있습니다.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전구를 갈아 끼우는데, 문득 대구 효목동 기자촌에 살면서 아침마다 고무로 된 통을 들고 물차 앞에 줄서서 물을 받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기억은 그렇게 어느 순간 갑자기 저를 덮치곤 합니다. 아! 그래! 맞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그 시절에는 집집마다 물이 끊기는 일 자주 있었거든요. 바가지며 양동이며 온 식구가 골목 끝에 나와서 줄을 섰습니다. 물차가 오면 최대한 많이 받으려고 애썼고, 그걸 집까지 들고 가는 동안 줄줄줄 다 흘리기도 했었지요.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새카맣게 잊고 지냈던 과거 어느 순간의 기억이 퍽 하고 떠오르는 겁니다. 내 인생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면, 마치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만난 듯 반갑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며 아련하기도 합니다.
글쓰기의 가장 바닥에는 기억이 존재합니다. 아무런 기억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한 줄도 쓸 수 없을 겁니다. 삶의 곳곳에 존재하는 어느 순간의 기억들. 그 소중하고 아름다운 순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행위가 바로 글쓰기란 말입니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을 되찾아 그의 품으로 달려가 안기는 순간, 우리는 그런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 눈물은 감동이며 감탄이며 기쁨이자 반가움입니다.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행이다!" 느끼는 것이지요.
지난 시절을 떠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다 보면, 인생이 참 삭막하고 쓸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 내게도 친구가 있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사건이 있었고, 고민이 있었고, 또 열심히 살았던 흔적이 있습니다. 내 인생입니다. 소중한 내 인생입니다.
그런 시간들을 모두 잊는다는 건, 지금 열심히 살고 있는 이 모든 순간들도 결국 잊혀진다는 얘기인데요. 허무하고 공허한 일이지요. 모든 순간을 기억하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몇 조각이라도 지난 시간을 떠올리고 기리는 것은 꼭 필요한 행위라고 믿습니다.
글을 쓴다는 건 지난 시간 속의 나를 다시 만나는 일입니다. 다 지나갔으니까 그냥 잊고 살아도 된다?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를 놓치는 것도 문제이지만, 과거를 무시한 채 지금 눈앞에 닥친 일들을 처리하는 데에만 급급한 것도 바람직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자기 인생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 가져야 합니다. 철 없었던 시절의 나, 머리를 빡빡 깎았던 나, 밤새도록 쓴 편지를 결국 전하지 못했던 나, 담임 선생님 결혼 소식에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던 나, 일에 치이고 관계에 얽히고 책임 때문에 어쩌지 못한 채 사는 게 힘들다 한숨 짓던 나.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았더라도,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간을 사랑해야 하는 겁니다.
한 줄씩 꾹꾹 눌러 씁니다. 어느 순간 툭 떠오른 기억을 놓칠세라 얼른 메모를 하고, 노트북 앞에 앉아 그 날의 기억을 더듬다 보면 어느 새 저는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어린 시절의 저를 만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슬픈 장면도 아닌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루만에 책 한 권을 써서 수익화를 창출한다는 말을 접할 때마다 속상하고 화가 납니다. 지나온 시간 어느 한 구석에 잊고 살았던 내가 있습니다. 분명 내 인생인데도 까맣게 놓치고 살았던 거지요. 손 한 번 잡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