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아내가 아기를 안고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왔을 때, 나는 가장이 되었다는 책임감과 아빠가 되었다는 기쁨에 한창 들떠 있었다. 장모님이 집에 머물면서 내가 출근한 사이 아내와 아들을 돌봐주셨다.
주말이 되었다. 아기 목욕을 시켜야 한다면서 장모님이 팔을 둥둥 걷어붙였다. 어? 목욕? 이 조그만 아기를 어떻게 씻겨야 하나? 한쪽 팔 길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기를 물에 푹 담궈야 하다니.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내도 떨떠름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어쩔 도리 없이 장모님만 쳐다보았다.
아기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반쯤 채우고는 장모님이 한쪽 팔로 아기를 딱 받쳐들었다. 특히, 손으로 아기 목을 단단하게 고정하고, 몸을 욕조에 반쯤 담궜다. 다른 손으로 물을 묻혀 아기 얼굴을 뽀득뽀득 씻기는데, 그 속도가 워낙 빠르고 정확해서 탄성이 절로 나왔다.
"물에 오래 담궈놓으면 금세 감기에 걸리니까 목욕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하네. 혹여 베란다 창문이라도 열어놓으면 큰일나니까 조심하게. 물기를 닦고 나면 아기 크림 골고루 발라주고 옷도 얼른 입혀야지. 하다 보면 금방 감 잡을 테니 걱정 말게."
장모님은 셋을 키웠다. 지금보다 훨씬 못한 시절이었으니,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돌보는 일이 보통 아니었을 터다. 새삼 장모님이 대단해 보였고, 세상 엄마들이 위대하게 느껴졌다.
사흘 후에는 내가 직접 아기를 씻겨 보았다. 장모님 하는 모양새를 유심히 살폈던 터라 제법 흉내는 낼 수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장모님도 흡족해 하셨다. 이제는 세상에 없는 장모님. 훌쩍 커버린 아들.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부모는 초보다. 키워 보지 않았고 먹여 보지 않았으며 씻겨 보지 않았다. 당연히 서툴고 부족하고 어설프다. 제대로 할 줄 모른다 하여 언제까지고 장모님한테 아기를 맡길 순 없다. 부딪히고 실수하면서 배우고 익혀 점점 익숙해질 수밖에.
글쓰기도 똑같다. 제대로 배우거나 정식으로 써 본 경험이 없으니 모두가 초보 작가다. 쓰윽쓰윽 글 잘 쓰는 기성 작가들의 작품을 읽으면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런 다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많이 자주 써 봐야 한다.
당연히 엉망진창 미흡할 수밖에. 그런 글을 꾸준히 쓰다 보면, 또 좋은 작품을 많이 읽다 보면, 어느 새 글쓰기 감각을 익히고 문법도 알아가게 된다. 아기 씻기는 일이 두렵다 하여 계속 미루고 있으면 꼬장꼬장 더럽고 감염 위험도 생길 텐데 그 일을 어쩔 텐가.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일단 쓰는 것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이다.
두어 번 씻기고 나니까 아기 목욕에 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뽀얀 살결 물로 적시는 동안 이상하리만큼 벅찬 감정이 솟아나기도 했다. 카시트에 아이를 앉히는 것부터 이유식 먹이고 트름 시키는 것까지. 기저귀 갈고, 옷 입히고, 팔 꼼짝 못하게 꽁꽁 싸매는 것까지.
모든 게 서툴고 어색한 초보 아빠였지만, 만약 지금 내가 아기를 돌보게 된다면 씩씩하게 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실수하고 깨지고 넘어졌던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덕분이다.
감옥에서 처음으로 썼던 글부터 지금까지 내가 적은 모든 글을 보관하고 있다. 그 시절 썼던 글은 차마 꺼내 읽을 용기가 없지만, 어쨌든 수많은 글을 쓴 덕분에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느 정도 조리 있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초보가 어떤 일에 능숙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일을 많이 해 보는 것뿐이다.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뻔뻔스러울 수 있는 때는 초보 시절밖에 없다. 특권이다. 누려야 한다. 피하고 도망다닐 게 아니라, 망설이고 주저할 게 아니라, 마음껏 도전하고 실수하고 잘못하고 엎어지고 망가져야 한다.
충분히 많은 실수를 할 수 있어야 그 만큼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더 많이 실수한 사람이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는 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누구든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으면 "저는 예전에 이 만큼 힘들었습니다."라는 얘기부터 꺼내는 거다.
나도 크게 무너진 적 있다. 덕분에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당당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박사, 교수, 의사, 판검사 등등 내로라하는 전문가들 만나도 기죽지 않는다. 내가 그들보다 더 큰 실패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초보임을 특권으로 여겨야 한다. 점점 좋아지고 나아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머물러 있었다면, 주저하고 망설이는 중이라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