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가볍게
글쓰기 수업에 참여한 이들에게 자기 소개를 요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은 나이와 거주 지역과 자녀의 수입니다. 예를 들면, "서울에 살고 있는 두 아이의 엄마이고 사십대입니다. "라는 식이죠.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소개 문구이지만, 그리 인상적이지도 않은 표현입니다.
짧은 시간에 자신을 소개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수십 년 살아온 인생을 불과 몇 초만에 요약 정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다행히, 글을 쓸 때는 다릅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떤 성격이고, 혈액형은 무엇이며,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족과 직업에 대해서 등등 쓰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쓸 수가 있습니다.
혼자만의 글이 아니라 누군가 읽는 사람이 존재하는 글이라면,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독자가 과연 나의 인생 하나하나에 관심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지요. '자전적 에세이'라고 일컬어지는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이야기니까 그나마 쓰기가 수월할 거라는 편견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써야 하는가 라는 막막함을 동시에 가지는 장르입니다.
자전적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일반 에세이나 자기계발서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노하우를 쓸 때,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얘기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답하기가 난감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콜콜 다 늘어놓자니 재미가 하나도 없을 테고요. 그렇다고 해서 뚝뚝 끊어 쓰자니 앞뒤 연결이 되지 않을 것 같아 걱정입니다.
10년 동안 매일 글을 썼습니다. 주로 저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감정 위주로 글을 썼고,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을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했으며, 지금은 경험과 견해를 고루 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삶의 이야기를 쓰는 요령과 방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참고가 되면 좋겠습니다.
엄마와 함께 재래시장에 다녀온 어릴 적 경험을 쓴다고 칩시다.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장을 다 보고 집에 돌아온 시각까지 모든 걸 다 쏟아부으려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글이라기보다는 일정표에 가깝겠지요.
장을 보다가 국밥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은 이야기. 출발부터 끝까지 총 8시간 걸렸다면, 점심 먹은 시간은 불과 30분에 불과할 겁니다. 하지만, 그 30분의 이야기가 엄마와 함께 재래시장을 다녀온 나의 모든 느낌과 감정을 전부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엄마가 어떤 사람인지, 엄마와 나의 사이는 어떠한지, 엄마가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런 엄마를 지켜보는 나의 감정...... 30분 동안 함께 국밥 먹은 이야기만으로도 얼마든지 참한 글이 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국밥집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무엇이 보였습니까? 특유의 냄새는요? 자리는 어디로 잡았나요? 손님은 많았습니까? 메뉴판은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던가요? 에어컨 성능은 좋았습니까? 엄마는 무엇을 주문했습니까? 당신은요? 주문은 누가 했습니까? 주문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친절했나요? 물은 생수였습니까? 아니면 보리차? 국밥은 맛이 어땠나요? 건더기는 푸짐했습니까? 혹시 엄마가 국밥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까?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고 설명하지 말고, 독자를 국밥집으로 데리고 가서 같이 국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생한 글을 쓸 수가 있고, 또 공감도 받을 수 있습니다.
엄마의 흰머리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 더운 날씨에 장을 보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엄마를 보니 안쓰럽다, 그런 엄마를 위해 앞으로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엄마 사랑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글을 믿지 않습니다. 저도 어머니 모시고 재래시장 다닌 적 많습니다. 가끔은 어머니 모습 보면서 가슴 짠한 적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장을 보는 과정'에 집중한 적이 더 많았거든요. 값을 깎는 어머니의 고집이 못마땅한 적도 있었고, 빨리빨리 걷지 못하는 어머니가 답답하게 여겨진 적도 많습니다.
'엄마를 향한 사랑'이라는 메시지에 지나치게 매몰되면, 진실보다는 가짜 글을 쓰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메시지는 맨 마지막입니다. 일단은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렵지요. 자신의 감정과 마음과 생각에 집중해 본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자신의 진짜 감정과 생각이 무엇인지 관심 갖고 들여다보는 연습을 하면 좋겠습니다.
인생 이야기를 쓸 때,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쓸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시간 낭비이고요. 그래서 저는 "짧은 글을 여러 편 쓰길" 권합니다. 단편입니다. 단상입니다. 있었던 일을 가볍고 짧게 쓰고, 그에 따른 '진짜 감정'을 담아 보는 연습을 하는 것이죠.
이렇게 하면, 우선 인생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이 크게 어렵지도 않고요.
글쓰기는 밤길 운전과 똑같습니다. 밤에 운전을 하면 어떻습니까? 멀리까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헤드라이트 켜면, 불과 50미터 정도 앞만 보입니다. 우리는 그 50미터를 보면서 운전합니다. 그래도 항상 목적지에 정확히 도착합니다.
글쓰기를 지나치게 크고 멀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글쓰기를 위대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일이라고 해서 위대하게 접근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오늘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 전부입니다.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고 정성을 쏟는 것이 바로 '최선'이지요.
글쓰기에 관한 욕심이 글 쓰기를 어렵게 만듭니다. 책을 쓰기는 힘들고 어렵지만, 오늘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작고 가볍게,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