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나는 대로 마구
작가를 꿈꾸던 시절 비싼 몰스킨 노트를 샀습니다. 유명 작가들이 사용한다는 그런 노트를 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첫 페이지에 또박또박 첫 문장을 썼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지우면면 자국이 남을까 봐 그냥 뒀습니다. 일주일 후, 그 노트는 겨우 한 페이도 채워지지 않은 채 서랍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에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수첩을 샀습니다. 마음대로 휘갈겨 썼습니다. 화살표를 그어 문장을 연결하고, 여백에 메모를 덧붙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통째로 줄을 그어 지웠습니다. 글 쓰는 데에 훨씬 유용했습니다. 천 원짜리 공책이 3만 원짜리 몰스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었습니다.
왜 엉망진창 수첩이 더 효과적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심리적 부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노트 앞에서는 완벽해지려는 습성이 있지요. 글은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시행착오에서, 엉망진창인 과정에서 나옵니다. 지저분한 노트는 무언가를 쓰는 데 있어 아무런 부담이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생각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하면 생각이 끊깁니다. '이걸 어디에 쓸까?', '어떤 순서로 정리할까?' 이런 생각들이 창의성을 막습니다. 엉망진창으로 쓰면 떠오르는 순서대로, 연결되는 대로 쓰면 됩니다. 정리는 나중에 하면 되지요.
세 번째 이유는 우연한 발견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에는 예상한 것만 있습니다. 엉망진창인 노트에는 예상치 못한 연결이 있습니다. 우연은 계획된 정리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수첩도 대부분 엉망입니다. 마르케스의 수첩은 낙서투성이였고, 헤밍웨이의 노트는 수정과 삭제로 가득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말했습니다. "내 노트는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합니다." 그들의 수첩이 엉망인 이유는 게으르거나 정리를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게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다섯 권의 수첩을 동시에 사용합니다. 책상 위에, 가방 속에, 잠자리 옆에, 차 안에, 그리고 화장실에 둡니다. 어디서든 생각이 나면 가장 가까운 수첩을 집어 듭니다. 생각 날 때 바로 적는 게 나중에 정리하는 것보다 중요합니다.
주기적인 정리가 필요합니다. 정리 작업은 메모하는 단계와 완전히 분리되어야 합니다. 메모할 때는 최대한 자유롭게, 정리할 때는 최대한 체계적으로. 두 단계를 뒤섞으면 둘 다 망칩니다.
엉망진창 수첩의 또 다른 장점은 좋은 아이디어를 찾게 해준다는 사실입니다. 깔끔하게 정리된 노트를 보면 모든 내용이 다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엉망진창인 노트를 며칠 후 다시 보면 좋은 아이디어만 눈에 확 띕니다. 희한하지요. 수많은 뒤죽박죽 메모 중에서 유독 빛나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게 딱 보인다니까요.
제 수첩에는 온갖 잡다한 내용이 마구 섞여 있습니다. 강연 아이디어 옆에 저녁 메뉴가 적혀 있고, 책 구상 아래에 전화번호가 적혀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지저분한 수첩이 부끄러웠습니다. 지금은 이게 제 스타일이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삶과 글쓰기가 분리되지 않은 것처럼, 수첩도 분리되지 않습니다.
엉망진창 수첩을 보면 생각의 과정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A라고 생각했다가, B로 바뀌고, 결국 C에 도달한 과정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정 자체가 소중합니다. 최종 결론만 남기면 나중에 왜 그렇게 결론 내렸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수강생들에게 항상 강조합니다. "다이소에서 파는 천 원짜리 수첩이면 충분합니다. 비싼 노트는 나중에 사세요. 지금은 마음껏 망쳐도 되는 노트가 필요합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는 나중에 알 수 있습니다. 쓰는 순간에는 모릅니다. 그러니 일단 다 써야 합니다. 엉망이든 뭐든 일단 쏟아내야 합니다.
작가의 수첩은 예술 작품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적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을 위한 도구입니다. 생각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깨끗하고 예쁜 것보다 중요한 건, 그릇이 넘칠 만큼 생각의 흔적들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완벽한 정리를 추구할 필요 없습니다. 깨끗한 노트에 연연하지 마세요. 대신 자신의 생각으로 수첩을 채워야 합니다. 엉망이어도 괜찮습니다. 지저분해도 괜찮습니다. 깨끗하고 빈 것보다 지저분하지만 가득 찬 수첩이 훨씬 낫습니다.
작가의 수첩은 박물관에 전시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어야 합니다. 엉망진창 속에서 명작이 탄생합니다. 자신의 수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보세요. 그것이 글을 쓰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 책쓰기 무료특강 : 10/24(금) 오전&야간
- 신청서 : https://forms.gle/xdvDShrgFmiEqbJm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