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나를 위한 신호
예전에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화가 났습니다. 정해진 기한까지 업무를 마쳐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늦어질 때. 밤잠 설쳐가며 마무리했는데 엉뚱한 이유로 결재를 받지 못했을 때. 주어진 일은 태산인데 뜬금없이 회식에 참여해야 할 때. 이런 모든 상황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요.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는 가족이나 다른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늘 시한폭탄 같았고, 언제 어디서 누구라도 툭 치기만 하면 폭발하곤 했습니다. '화'는 저를 치졸하고 못난 인간으로, 성질 더러운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화'에 관한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감정을 조절해야 한다는 내용의 도서도 꽤 읽었고요. 하지만, 그런 책에서 말하는 방법들이 제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저 매 순간 화가 났고, 화를 내면서 살았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감옥에 가서 처음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 곳에서는 함부로 화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자칫 옆 사람과 시비라도 붙어 싸움을 하게 되면 벌점을 받아 형량이 늘어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감자에게 '추가'는 죽기보다 싫은 처벌이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화'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언제 어떤 경우에 파르르 떨게 되는지 알게 되었고, 또 주변 사람들이 화 내는 모습도 살필 수 있게 되었지요. 한심하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습니다. 화를 낼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화를 내는 저 자신을 보고 있자니 별 것도 아닌 일로 분통을 터트리는 꼴이 유치하고 어이 없더군요.
다른 사람의 화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굴이 시뻘게지고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던지는데, 그렇게 화를 내는 원인이 기가 찰 정도로 대수롭지 않은 일들이란 점에 놀랐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화를 '막' 내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글쓰기가 사람의 감정을 치유한다는 말, 솔직히 지금도 완전히 믿지는 않습니다. 한 편의 글을 쓰면서도 마음이 진정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10년째 글을 쓰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부글부글 끓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냥 화를 낼 때는 몰랐던 사실인데, 글을 쓰다 보니 '이왕이면 화도 좀 멋있게 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옆 사람 한 마디에 발끈하기보다는 나라의 운명이 달린 문제에 화를 내는 것이죠. 눈앞에 닥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보다는, 힘 없고 돈 없는 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회 제도에 화를 내는 것이 훨씬 멋있습니다. 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는 것보다는 우리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는 현실에 화를 내야 합니다.
크고 멋있게 화를 내는 제 모습을 상상할수록 현실에서 사소한 일로 화를 내는 제 자신이 형편없이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생각을 키울 수 있었던 거지요. 모두가 글쓰기 덕분입니다.
저는 지금도 종종 화를 냅니다. 저 자신한테도 화를 내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화를 냅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적어도 제가 정한 원칙과 룰에 따라 화를 낸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글쓰기나 독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태도지요. 태도가 바르면 굳이 글을 쓰거나 읽을 필요조차 없다고 확신합니다. 태도가 엉망이면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읽는다 한들 다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나태해지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면 저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경우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 보면 화가 납니다.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이왕이면 좋은 말로 하려고 애씁니다. 잘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이런 저의 노력 자체만으로 저는 성장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글을 쓰면, 자신이 화를 내는 모습조차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죠. 화내는 순간이 글감이 된다는 뜻입니다. 순간적인 감정에 빠져 미친 듯 날뛰는 게 아니라, 화를 내면서도 옳고 그름을 계속 지켜보게 됩니다. 이건 아니다 싶으면 점점 화가 줄어들고, 그래도 이건 마땅하다 싶으면 강하게 주장합니다.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도 있고, 화를 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니 억지로 막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책도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화'라는 감정조차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활용하는 것이 최고란 사실이지요.
글쓰기를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문제를 덜 심각하게 만듭니다. 더 유용하게 만들어 줍니다. 글쓰기가 어떻게 만병통치약이 되는가. 글쎄요. 만병통치약이라고까지는 말하기 힘들겠습니다만, 아무튼 글 쓰면서 제 삶의 모든 부분이 좋아졌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글을 쓰면 모든 순간으로부터 배울 수 있습니다. 화가 날 때도 슬플 때도 누군가가 미울 때도...... 불편한 감정으로 스스로를 피폐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글 한 편 쓰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