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새마을호 열차가 유일한 빠른 교통 수단이었던 시절, 대구에서 서울까지 4시간 20분 걸렸습니다. 지금은 KTX나 SRT 덕분에 훨씬 빨라졌습니다. 대구에서 수서역까지 1시간 40분이면 충분합니다. 서울 다녀오기가 한결 수월해졌고 부담 없습니다.
무려 2시간 40분이 줄어들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제게 2시간 40분이란 시간이 새로 생긴 것이지요. 현상을 있는 그대로만 보면 저는 2시간 40분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새마을호 타고 다닐 때보다 더 바쁩니다. 분명 여유 시간이 생겼는데, 왜 저는 더 바쁜 걸까요?
하루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24시간 주어집니다. 정신없이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요. 만약 누군가에게 3시간이 더 주어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얼핏 생각하기엔 너무 좋겠다 싶지요. 허나, 그 사람의 여유는 결코 오래 가지 못할 겁니다. 한 달만 지나면 24시간 주어지는 사람이나 27시간 주어지는 사람이나 똑같이 바쁠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정을 '관리'합니다. 그들의 다이어리를 보면,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빈 칸이 없을 정도로 빼곡합니다. 어떻게 이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다 소화하고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하게(?) 보입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들이 아주 잘살고 있는 것처럼느껴지기도 합니다.
만약 그들에게 '빈 칸'을 더 제공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네, 맞습니다. 얼마 못 가서 새로운 빈 칸도 금방 채워질 겁니다. 빈 술잔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그들은 빈 시간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또 새로운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울 겁니다. 그것이 잘사는 길이라는 믿음을 간직한 채 말이죠.
치열한 경쟁과 능력 위주의 사회입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낙오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강합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질주'를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주어진 인생인데 낭창하고 게으르게 사는 것보다는 치열하게 사는 것이 훨씬 보기 좋은 것 같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선순위가 필요합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질주하며 살더라도, 적어도 무엇을 향해 가는지는 알고 있어야 마땅합니다. 목적지도 없이 전력질주를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짓은 없습니다. 과거의 제가 딱 그랬거든요. 결국은 모든 걸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지요.
자신의 인생에서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머리가 아픕니다. 답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고민하고 숙고하느라 식은땀이 흐릅니다. 그럼에도 반드시 질문해야 하고, 또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을 향한 이런 질문이 바로 '정체성'을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제, 종일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일요일인데, 저는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지요. 토요일 밤부터 부담스러웠습니다. 독서모임 천무 준비, 공저 프로젝트 퇴고 강의, 잠실 강연회 후기 작성, 마감 일정에 따른 개인 저서 퇴고, 2월에 진행할 전자책 수업과 라이팅 코치 육성 과정 준비, 거기에 아버지와 어머니 요청하시는 일들까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렇게 할 일이 많은 날이었는데, 제게 어제 새벽 4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은 글쓰기와 독서였습니다. 제 생각과 기분을 적고, 그리고 홍자성의《채근담》을 읽었지요.
누군가 제 하루를 지켜 보았다면 분명 물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덜 급한 일을 새벽부터 먼저 할 필요가 있을까? 종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당연히 급하고 해야만 하는 일들을 먼저 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 많다 하더라도,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이 제게는 먼저입니다. 글쓰기와 독서는, 당장 눈에 보이는 보상 따위 없는 일이지만, 제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글 쓰고 책 읽는 사람. 이것이 바로 저의 '정체성'입니다.
본질에서 벗어난 '바쁨'은 종착지 없이 질주하는 열차와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은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 겁니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라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을 텐데요. 저는 그 누구도 제가 겪었던 치욕스럽고 절망적인 경험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간절한 바람으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인생은, 얼마나 빼곡하게 빈 칸을 채우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자기답게' 사는가가 중요하지요. 다른 사람의 '좋아요'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내가 좋아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 바라는 인생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서슴없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하며, 대답을 하는 동안 저절로 미소가 지어져야 합니다. 굳이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주변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미소 말입니다.
바쁘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저도 엄청 바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디를 향해, 어떤 의미와 가치를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것인가는 제대로 알고 바빠야 하겠지요.
본질과 도구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도구를 본질로 오해하면 인생 망칩니다. 다이어리 작성은 본질이 아닙니다. 독서도 본질이 아닙니다. 글쓰기, 책쓰기도 본질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단지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본질은, 주어진 시간 동안 얼마나 가치 있는 확장과 행복을 이루어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 지금 도구 그 자체를 위해 달리고 있지는 않은가요? 다이어리 작성하느라 바쁜 건 아닙니까? 글 쓰고 책 읽느라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가요? 만약 그렇다면, 진정 바라는 인생이 무엇인지 꼭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 할 길이 명확하면, 다이어리 작성도 행복하고 글 쓰고 책 읽는 시간도 기쁘고 벅찰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 보니 시간만큼 귀한 것이 없습니다. 잃어버린 시간도 아깝고, 흘러가버린 시간도 아쉽습니다. 제게 남은 시간이 얼마이든, 더 이상 후회나 회한으로 남기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모든 시간이 진정한 삶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려 합니다. 오늘도 글 쓰고 책 읽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