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사는 데 필요한 것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니까 뭐라도 찾게 되더군요. 절, 교회, 성당 등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곳들을 제발로 찾았습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었지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이번 고비만 넘게 해 달라고, 이번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딱 한 번만 살려만 주면 평생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그렇게 빌었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신은 저를 철저하게 무시했습니다. 달라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시궁창으로 빠지는 것 같았습니다.
새벽 4시에 일산에 있는 어느 교회를 찾은 적 있습니다. 맨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았습니다. 파주에 있는 절에 가서 돌부처 가랑이를 붙잡고 오열한 적도 있습니다. 명동 성당에 가서 혼자 마당을 서성이기도 했습니다. 때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기도 했었지요. 절박한 심정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뿐입니다.
살려달라는 절박함 다음으로 제 마음을 뒤집어놓은 것은 '왜'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긴 것인가.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내가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길래. 사람을 이토록 처참하게 만드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그것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부서져야 하는 것인가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시간이 지날수록 억울하고 분하다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를 잘못했으면 하나에 대한 벌만 받아야 하는데, 저는 인생을 통째로 날려야 했으니까요. 저한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세상과 타인에 대한 분노만 일어났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가 있으니 포기라는 걸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싶으니까 그제야 제 신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지요. 하나하나 짚어 보았습니다. A는 B를 낳고, B는 C를 끌어들이고, C는 D를 만들었습니다. 저한테 일어난 모든 일은 원인이 있었고, 그 원인은 죄다 제가 자초한 것들이었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면서 저한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성격이구나, 나는 이럴 때 화를 내고, 또 이럴 때 기분이 좋아지는구나. 평생 처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처음으로 마주하는데,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습니다. 절망과 슬픔과는 달랐습니다. 눈물을 흘리는데 속이 시원해졌습니다.
호흡이 편안해졌습니다. 얼굴을 찌푸리는 일도 줄었고, 짜증을 부리며 화를 내는 일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인생이 더 좋아진 것도 아닌데, 제 마음은 편안해졌습니다.
저 자신을 마주하고 나니까,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누가 아프다고 하면 귀를 기울이게 되고, 누가 힘들다고 하면 안타깝게 느껴지고, 누가 괴롭다고 하면 어떻게든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습니다. 과거에 저는 아프고 힘들고 괴롭다는 사람 거들떠 보지도 않았습니다. 달라졌던 것이죠. 이제는 누가 무슨 말을 하면 그 사람 쪽으로 몸을 틀었습니다.
글에는 크게 두 가지를 담았습니다. 저의 이야기, 그리고 제 글을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 책을 출간했을 때, 제 책을 읽은 사람들이 도움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다시 웃었습니다. 아마 6년만이었을 겁니다. 저한테 누군가를 도울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참으로 오랜만에 기쁨이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던 거지요.
참혹했던 시간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시 하라면 못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 모든 시간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의 이 행복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테니 말이죠.
신은 저를 무시한 게 아니었습니다. 신은 저를 모른 척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신의 의도였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시건방 떨면서 자기밖에 모른 채 살았던 한 인간을, 극도의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붙여 존재 이유와 가치를 깨닫게 해 준 것이죠.
잘 살고 싶었습니다. 이런 제 마음을 신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한테 상실과 시련과 고통과 슬픔을 주었던 겁니다. 딛고 일어서는 힘과 자신을 직시하는 용기와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사랑. 잘 살기 위해 제가 꼭 가져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