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장비빨도 필요하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내는 늘 저한테 말합니다. 가방 좀 가볍게 해서 다니라고 말이죠. 가방을 몽땅 비운 다음 꼭 필요한 것들만 다시 한 번 챙겨 봅니다. 노트북, 충전기와 선, 아이패드, 키보드, 마우스, 책 한 권, 빔 프로젝트 연결 젠더들, 각종 필기구, 수첩...... 정리를 하는 것인지 다시 도로 집어넣기만 하는 것인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전부 다 꼭 필요한 것인가? 글쎄요. 답변하기가 모호합니다. 필요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필요없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매번 가방을 터질 듯 챙겨 다니니, 아마도 저는 조금 미련한 사람인가 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저는 가방 속에 들어가는 물건들을 하나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어깨가 내려앉아도 끝까지 이 무게를 고수할 생각입니다.
첫째,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으로 글을 쓰게 될지 모릅니다. 열차 안에서도, 인근 카페에서도, 잠깐 누구를 기다리면서도, 저는 틈이 날 때마다 꼭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만약 글을 써야 하는데 뭔가 하나라도 도구가 없어서 못 쓰게 된다면, 아, 그 땐 정말이지 절망적일 것 같습니다.
둘째,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로 글을 쓴 적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참 초라하고 처절했구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런 시절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활용해서 글 쓰고 싶습니다.
두 가지 이유 모두 좀 유치하지요? 네, 맞습니다. 인정합니다. 노트북 한 대만 들고 다녀도 얼마든지 글 쓸 수 있는데, 굳이 그렇게 많은 짐을 몽땅 싸들고 다닐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어느 곳에서라도 정식으로 모든 장비를 풀어놓고 폼나게 쓰고 싶습니다. 폼만 잡고 글을 쓰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저는 이왕이면 폼도 잡고 글도 잘 쓰고 싶거든요.
작가가 창의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주변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의치 못한 상태를 바꾸기 위해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자신에게 맞는 분위기 연출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 있겠지요.
오해의 소지가 있을 것 같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똥폼만 잡고 글 쓰지 않을 거면 애초에 장비 따위 마련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괜히 돈만 쓰는 낭비입니다. 나에게 맞는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려면 당연히 글 쓰는 행위를 최우선으로 여겨야 합니다.
본질에 충실하면 좀 꾸며도 됩니다. 겉치레에만 신경을 쓰는 거라면 무조건 말리고 싶지만, 부지런히 연습하고 꾸준히 글 쓰는 사람이라면 필요한 것들 챙겨서 폼 좀 잡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결론은 이렇습니다. 쓰고 싶다면, 글을 쓰겠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쓰는 방향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서 적극 실천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순서입니다. 글부터 쓰고 장비 마련하세요. 비싼 노트북 사가지고 유튜브만 보는 사람 천지고요. 아이패드 구입해서 넷플릭스만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글 쓰는 사람은 글 쓰는 행위가 가장 먼저입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작가가 되어야겠지요.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