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아들
열무와 얼갈이 배추는 비닐 봉지 두 개에 나눠 담겨 있었습니다. 둘 다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릴 정도의 무게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씩씩거리며 차 트렁크에 던지다시피 넣고는 시동을 걸었습니다. 바쁘고 피곤해 죽겠는데 뭘 이런 걸 또 시키고 난리야.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트렁크를 열어 김치 담을 재로를 집어올렸습니다. 무겁지 않아 번쩍 들었지요. 그 순간, 저는 차 옆에 잠시 멈춰 꼼짝도 하지 못했습니다. 제 손에 들린 비닐 봉지를 가만히 쳐다 보았습니다.
그 옛날 재래시장에서 김장 담을 재료를 구입해 양손 가득 들고 힘차게 다니셨던 어머니. 이제는 이 가벼운 열무와 얼갈이조차 들 힘이 없었던 겁니다. 기력이 많이 약해졌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버이날은 오늘이지만, 어제 부모님 모시고 외식했습니다. 오늘은 두 분만 따로 다른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팔공산 "오궁"이란 식당에 갔는데요. 오리 보쌈과 오리 불고기를 시켜 푸짐하게 잘 먹었습니다.
최근에 제가 하는 일, 그리고 저한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잔뜩 수다를 늘어놓았습니다. 말을 하다 보니 끝을 맺을 수 없어서 식사하는 내내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되었지요. 어머니 환하게 웃으시고, 아버지도 재미 있다 하셨습니다.
크게 바라시는 것 없습니다. 하나 뿐인 아들이 좀 싹싹하게 대화를 하고, 표정 굳지 않고, 분위기 싸하게 만들지 않는 것. 그저 편안하게 말 주고받고 웃을 수 있으면 그만이었습니다. 이 별 것 아닌 대화와 웃음을, 참으로 오랜만에 부모님과 나눈 것 같습니다.
오늘 약속 다녀오신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 있었냐고 묻자, 어머니가 택시에 휴대 전화를 놓고 내렸다 합니다. 다행히 기사와 통화가 잘 되어서 늦은 밤까지 휴대 전화를 가져다 주기로 했습니다.
다른 짐이 많은 것도 아니고, 고작 휴대전화 또는 지갑이 전부인데 그마저 챙기지 못하는 어머니가 답답해서 한소리 하고 말았지요. 민망한 표정을 짓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아내가 어머니 곁에 앉아 한참 얘기를 나눕니다.
다리가 불편해서 대중교통 타고 내리는 속도가 느립니다. 택시 기사 눈치가 보여서 서둘러 내리느라 휴대 전화를 미처 챙기지 못한 모양입니다.
아직은 김치 정도는 담을 힘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행복하게 여기는 분입니다. 다리 절뚝거리며 마트까지 가서 열무와 얼갈이를 샀는데, 막상 사고 보니 집에까지 들고 갈 수가 없어 거기다 맡겨 놓은 거지요. 저한테 좀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큰 거 바라지 않습니다. 아들과 소소한 대화 나누면서 웃을 수 있으면 충분했지요. 평소 무뚝뚝한 아들 때문에 궁금한 게 있어도 묻지 못하고 말 섞고 싶어도 눈치만 보셨습니다.
다리는 불편하고 마음은 급합니다. 서둘러 타야 하고 급히 내려야 합니다. 택시 타면 땀을 뻘뻘 흘리고, 택시에서 내리면 숨을 내쉽니다. 기사한테 폐 끼치지 말아야 한다면서 타고 내릴 때마다 용을 쓰는 겁니다.
저는 또 어머니한테 짜증을 부리고 말았습니다. 또 화를 내고 말았습니다. 또 서운한 마음 들게 하고야 말았습니다. 돌아서면 후회할 짓을, 오십 년째 하고 삽니다. 이래서 자식은 죄인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머니 잘 모셔야겠다, 어머니 노후에 효도해야겠다, 이제 어머니 편안하셨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이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정작 눈앞에서는 툴툴거리고 짜증내고 화내고 인상 쓰고 할 말 다 하면서 당신 마음 불편하게 만드는데요.
큰 실패를 겪고 감옥에까지 다녀왔습니다. 부모 심정 어땠을까요. 저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저는 아들 생각을 더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스스로 못났다 싶을 때마다 가슴이 시큰거립니다. 손으로 긁고 두들겨도 체한 것 같은 느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머니 앞에서는 자꾸만 속과 다른 말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팔십 년 살아온 인생입니다. 오십 년 살아온 제가 바꿀 수 없는 습관이고 성향이고 개성입니다. 뭐가 그리 못마땅하고,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요.
글 마무리에 앞으로 잘해야겠다 쓰고 싶은데, 차마 그럴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이 되면, 저는 또 어머니를 속상하게 만드는 말을 내뱉을지도 모르니까요. 누가 옆에 와서 저를 좀 호되게 야단쳐야 정신을 차릴 모양입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