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풍요롭게 만드는 시간
커피 한 잔 마시며 뿌연 세상 바라본다. 겨울비가 내린다. 운치 있다. 커피 맛이 더 진하게 느껴진다. 영남지방 가뭄이 50년만에 처음이란다. 그러고 보니 지난 가을 이후로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오늘 내리는 비도 많을 것 같지 않다. 촤악 쏟아붓는 비를 만나고 싶다.
비 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글감을 떠올린다. 무엇을 써 볼까. 막노동 현장에서 물에 흠뻑 젖은 벽돌을 옮기느라 종일 욕을 입에 달고 일했던 기억. 술에 취해 호기롭게 비 맞으며 여기저기 걸어다녔던 일. 아내와 연애할 때, 나의 왼쪽 어깨가 폭삭 젖는 것도 잊은 채 아내 쪽으로 우산을 기울였던 로맨틱한 추억.
비가 내리면, 비를 보고 있으면, 글감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글을 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내리는 비는, 다만 우리 안에 깃든 글감을 깨우는 자극에 불과하다. 사실, 글감은 비로부터 내게 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내 안에 있었다.
기억, 추억, 감정, 경험. 모두 내 것이다. 비는 소리와 풍경으로 불꽃을 일으킨다. 쓰고 싶은 욕망. 그래서 우리는 '비가 내리면' 이라고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글감이 내 안에 있고, 비는 그저 내 안에 잠든 욕구와 충동을 자극하는 불꽃이라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명하다. 글감을 찾아 떠날 것이 아니라, '나'를 풍요롭게 만들어야 한다.
무슨 일이든 기꺼이 경험해야 하며, 무엇보다 책 읽어야 한다. 일상의 모든 것이 글감이라고는 하지만, 글은 글감만으로 쓸 수 없다. 모든 글은 연결이다. 글감과 연결지을 만한 경험과 지식과 지혜가 자기 안에 있어야 한다.
연결할 만한 밑천이 부족한 사람은 겨울비가 좋다 나쁘다 따위의 단순 감정 위주의 문장만 줄줄 늘어놓게 된다. 겨울비라는 글감은 선명하지만, 연결지을 만한 경험이나 이야기나 감성이 없으니 글이 메마를 수밖에.
김 훈 작가가 쓴 비와 정여울 작가가 쓴 비와 이문열 작가가 쓴 비와 수전 손택이 쓴 비와 도스토옙스키가 쓴 비와 스티븐 킹이 쓴 비가 내 안에서 뒤엉키고 흩어져 장대한 파도를 일으킬 때, 겨울비는 자극과 충동과 연결을 거쳐 비로소 '나의 글'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숭고한 넋을 기리는 아침. TV 뉴스에는 대통령 후보의 자격을 운운하는 날선 목소리와 합천 산불 소식이 번갈아 나오고 있다.
겨울비가 내려도 세상은 좀체 시원해지지 않는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