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상황, 조건
글 쓰기 가장 적당한 곳은 어디일까요? 주변 소음이 없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며, 말 거는 사람이나 훼방 놓는 사람 없고, 창문을 열면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곳. 이 정도면 글 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환경이겠지요.
아쉽게도 저는 아직 이런 곳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감옥에서 글 쓰기 시작했으니, 그 곳은 뭐 말할 것도 없겠고요. 제 방이 따로 없어서 아들 방 빌려 쓰기도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쓰는 방은 너무 좁아서 책상도 놓지 못합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쓰던 앉은뱅이 테이블에다 노트북 올려 놓고 글 씁니다.
도로가 인접해 있어서 차 다니는 소리는 끊이질 않습니다. 주변에 공사하는 곳도 많아서 드릴과 기계와 공사 차량 소음 말도 못하고요. 아버지와 어머니 연로하셔서 툭하면 저를 부릅니다. 수강생들 전화와 카톡은 쉴 새 없이 울려댑니다. 글 쓰기에 적당한 환경을 얘기하자면, 저는 마땅치 못한 수준입니다.
일곱 권의 책을 썼습니다. 전자책 네 권 출간했습니다. 551명 작가 배출했습니다. 환경이나 조건은 글을 쓰거나 내 할 일을 하는 데 있어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보다 더 심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저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서도 글을 쓰고 책을 낸 사람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어떤 상황이나 환경도 내가 글 쓰는 걸 방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일전에, 글 쓰겠다면서 노트북 싸들고 제주도며 남해안으로 호텔 잡고 며칠씩 여행 떠나는 사람 많았습니다. 분명 돌아올 날짜가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더군요. 그들은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공기 좋고 환경 좋고 상황 좋고 조건 좋은 곳을 일부러 찾아 갔는데도 쓰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죠.
'바쁜 일' 끝내고 나서 글 쓰겠다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4년 전에 이렇게 말한 사람, 아직도 연락 없고요. 3년 전에 이렇게 말한 사람도 감감무소식입니다. 뭔놈의 바쁜 일이 3~4년씩이나 계속되는 건지.
비가 오면 글이 잘 써진다는 사람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도저히 글을 쓸 수가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비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달라질 뿐이지요.
음악 틀어 놓으면 공부 잘된다는 친구 많았습니다. 음악 소리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다는 친구도 적지 않았고요. 수학 선생님 좋아서 수학 공부 저절로 된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수학 선생님 미워서 수학이라는 과목 자체에 정 떨어졌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음악이나 수학 선생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각자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지요.
사람 대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빈정 상해 있으면, 옆사람 휘파람만 불어도 짜증이 나고요. 내 기분이 유쾌하고 즐거우면 옆사람 방구 소리도 예쁘게 들립니다. 문제는 옆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절에 가서 글 쓰겠다며 템플 스테이 신청했던 지인은 와이파이 안 터진다며 다시 내려왔습니다. 낮에는 너무 더워서 도저히 글을 못 쓰겠다며 한밤중에 카페를 찾은 친구는, 술 취한 사람들 때문에 더 못 쓰겠다며 집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이은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책쓰기 수업에 가서 글 쓰겠다던 사람은, 아직까지 초고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들이 실제로 '문제'인 걸까요? 쓰지 않는, 쓰지 못하는 진짜 이유가 혹시 '나 자신'은 아닐까요?
고요함과 평온함은 환경이나 상황이나 조건이 아니라, 우리 선택과 판단의 결과입니다. 쓰겠다고 작정하면 시장통 한가운데 자리 깔고 앉아서라도 쓸 수 있습니다. 안 쓰겠다 못 쓰겠다 마음 먹으면, 천상의 연못 앞인들 쓸 수가 있겠습니까.
"주변 환경이나 상황 등에 휘둘리지 말고 언제 어디서든 글 쓰는 행위에 집중하라!"
이렇게 말하니까 딱 꼰대 같지요? 네, 저 꼰대 맞습니다. 충분히 쓸 수 있는데도 쓰지 않는 사람들, 얼마든지 잘 쓸 수 있는데도 고민만 하면서 쓰지 않는 사람들. 그들 앞에 서면 더 심한 꼰대가 되고 싶습니다.
'글 쓰고 싶다'는 바람을 안고 있다면, 그 무엇도 쓰는 행위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견고한 울타리를 쳐야 합니다. 누가 총을 들고 머리를 겨누고 있으면서 한 줄만 쓰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쓰고 싶으면 그냥 쓰면 됩니다. 어떤 이유나 환경 때문에 쓰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쓰지 않는 것이지요.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입니다.
거실에서도 쓸 수 있고, 도서관에서도 쓸 수 있고, 지하철에서도 쓸 수 있고, 공원에서도 쓸 수 있습니다. 더워도 쓸 수 있고 추워도 쓸 수 있지요. 남편이나 아내가 곁에 있어도 쓸 수 있고, 남편이나 아내가 곁에 없어도 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설쳐도 쓸 수 있고, 아이들이 잠들어도 쓸 수 있습니다.
위 글 중에서 "쓸 수 있고"를 전부 다 "쓸 수 없고"로 바꾸어도 말이 된다는 사실. 자신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닷새 전부터 컨디션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습니다. 온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고, 피부는 엉망이 되고, 자꾸만 졸음이 쏟아집니다. 무슨 이상이 생긴 건가 다니던 병원에 가서 상담해 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합니다. 피로 누적인 것 같다며 영양제를 처방해주네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이틀쯤 푹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이 안 들겠습니까. 그럼에도 시간 되면 강의하고, 똑같이 새벽에 일어나 글 쓰고 책 읽고 강의자료 만들고 수강생 상담까지 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좀 쉬지 그래요."
주변 사람들의 이런 말이 저를 염려하는 마음이란 것은 잘 압니다만, 제 귀에는 악마의 속삭임으로 들립니다.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글쎄요. 아직 이런 상황까지는 아니거든요.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백기를 드는 것 같아 화가 납니다. 더 힘들면 쉴 겁니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할 겁니다. 피로와 몸살 정도로 저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세상은 크게 착각한 겁니다.
조용한 곳에서 글 쓰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부터 고요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가장 소란스러운 곳이 우리 머릿속입니다. 환경과 조건. 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품을 쓰려는 것인지. 잠들기 전 바닥에 엎드려 몇 몇 줄씩만 썼어도 벌써 책 나왔겠지요.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