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
운동 제대로 해 본 적 없다. 근육 없다. 물렁살이다. 몇 달 전에 헬스클럽 등록했다. 처음 며칠간 죽는 줄 알았다. 다리는 완전히 풀려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글 쓰려고 하면 두 팔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몸 만든 사람들 다시 보게 되었다.
열흘쯤 지난 후부터, 나는 헬스클럽에 가는 것이 두렵기 시작했다. 가면 또 고생이다 싶고, 안간힘을 쓰며 바벨을 들어올릴 것을 상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하루쯤 쉴까 잔머리를 굴리기도 했다.
막상 클럽에 가서 운동을 시작하면, 두려운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힘들기만 했다. 아! 썩 괜찮은 철학 하나를 찾은 셈이다. 두려움은 항상 '그 일을 하기 전에만' 생기는 감정이다. 정작 그 일을 시작하면 '하는' 데에만 연연할 뿐 두렵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다. 번지 점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뛰어내리기 직전까지는 두렵지만, 일단 뛰어내리면 적어도 두려운 감정만큼은 완전히 사라진다. 뛰어내리는 동안 무섭다 무섭다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책을 내고 싶다는 이들 중에는 글 쓰기가 두렵다는 사람 꽤 많다. 맞다. '쓰기 전'이다. 아직 쓰지 않고 있으니까 쓰는 것이 두려운 거다. 막상 쓰기 시작하면 쓰는 데에만 열중하게 된다. 스트레스도 받고 막막하기도 하고 짜증도 날 테지. 하지만 쓰는 동안 만큼은 적어도 두렵지는 않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쓰기는 쓴다는 얘기다.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은 최악의 감정이 두려움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피하게 한다. 도망치고 싶게 만든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보다 열 배는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다.
두려움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감정이다. 허상이란 뜻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실재하지도 않는 현상과 사건에 대한 '사전 신호'다. 인류는 이 두려움 덕분에 살아남았다. 두려움 덕분에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고, 들짐승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고, 도망갈 수 있었고, 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었다. 지금은 들짐승도 없고 이웃 부족의 침략도 없다. 스스로를 지켜야할 방어 기제가 엉뚱한 곳으로 향해버렸다. '평소와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하기만 하면 전부 위험해!'라고 인식한다. 8시에 일어나던 사람이 5시에 일어나려고 하면 온몸이 찌뿌둥하고 머리가 아프고 종일 컨디션 엉망이다. '실재'가 아니라 '신호'다.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두려움도 다르지 않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감정이다. 그러니까 두려움을 극복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 사건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감정'이기 때문에, 억지로 없애거나 외면할 수 없다. 피하려고 하면 더 빠져드는 게 두려움이다. 어디까지 두려울 수 있는지 끝까지 가 보겠다는 생각으로 부딪치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태도이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두 가지에 강해야 한다. 첫째, 팩트다. 실재하는 것에 반응해야 한다. 둘째, 감정이다.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힘들 때마다 두려움에 관한 글을 쓴다. 내가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지(실재) 먼저 쓰고, 다음으로 내가 얼마나 두려워하고 있는지(감정) 쓴다. 그런 다음에 내가 쓴 글을 읽어 본다.
실재를 마주하면 두려움은 줄어든다. 캄캄한 밤에 잘 보이지 않는 길을 걸으면 두렵지만, 환한 낮에 그 길을 걸으면 훨씬 덜 두렵다. 보이지 않아 두렵다면 훤히 보일 수 있도록 제대로 마주하는 작업을 먼저 할 필요가 있다.
번지 점프가 두려울 땐 뛰어내리는 게 최고다. 글 쓰는 게 두렵다면 일단 쓰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지금 뭔가 두렵다면, 가능한 빨리 그 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우리를 갉아먹는다. '나'라는 존재가 감정보다 먼저이다. '나'는 감정보다 강하다. 두려움을 없애기는 힘들겠지만 이길 수는 있다.
자신을 믿어야 한다. 충분히 두려워하라.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 감정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만드는지 제대로 느낀다. 그런 다음에 '그 일'을 함으로써 두려움이 사라지는 걸 온몸으로 느껴 본다. 몇 번만 반복해도 자신감 생긴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