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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Aug 28. 2023

가장 확실한 조언은 침묵이다

고요한 세상에서


수감중일 때, 어머니는 거의 매일 제게 서신을 보냈습니다. 아내도 이틀에 한 번은 편지를 보냈지요. 저는 그 편지를 읽으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내곤 했습니다. 눈물도 많이 흘렸고요. 글이 가진 힘을 새삼 느꼈던 시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단 한 통의 편지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서운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편지를 한 번도 보내지 않았던 아버지 마음을 어머니나 아내의 그것보다 훨씬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못난 아들을 믿었습니다. 아들이 결국은 다 이겨내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우뚝 설 거라는 믿음. 바로 그 '큰 침묵' 덕분에, 저는 한시도 게으르지 않게 살아낼 수 있었습니다.


가장 확실하고 도움이 되는 조언은 "침묵"입니다. 그 속에는 열 마디 말보다 더 깊고 명쾌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힘들어 하는 누군가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은 "너를 믿는다"는 침묵의 메시지입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묵직한 침묵이야말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에너지라 생각합니다.


2년 전에, 차를 몰고 지방으로 가던 중 급한 전화를 받은 적 있습니다.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내렸습니다. 통화를 하면서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는데요. 갑자기 앞 건물에서 누군가 뛰어나오더니 저를 향해 마구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곳은 금연구역도 아니었고, 제가 가만히 한 자리에 서서 담배를 피운 것도 아니었거든요.


길에서 담배를 피운 제가 백 번 잘못했다 치더라도, 밑도 끝도 없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고성과 욕설을 지르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그 사람 험상궂게 생긴 데다가 덩치도 커서 얼핏 보기에도 아주 무서웠습니다. 그냥 좋은 말로 딴 데 가서 담배 피워라 해도 될 일을 왜 그리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느냐, 저는 그에게 한 마디 대꾸도 못한 채 쫄보가 되어버렸습니다.


다시 차를 몰고 강의장으로 가면서 미처 생각지 못한 게 떠올라 아쉽고 답답했습니다. 소리 지르는 놈은 절대로 주먹질 못하거든요. 소리 지르는 놈은 주먹 휘두를 용기가 없는 겁니다. 그 사람이 고성과 욕설을 퍼부은 것은 애초에 주먹 따위 쓸 만한 깜냥이 되지 못한다는 증거였습니다. 제가 괜히 쫄았던 거지요. 맞을까 봐 쫄고, 싸우다 또 들어가게 될까 봐 쫄고. 담배를 피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미안함이나 잘못 되었다는 생각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눈에 힘을 빡 주고 나와서 저를 노려 보기만 했더라면, 저는 알아서 담배를 끄고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을 겁니다. 고성과 욕설보다 침묵과 눈빛이 훨씬 두려운 법이지요. "잘못된 바를 알아서 깨우치게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침묵입니다.


말이 많은 세상입니다. 인터넷과 SNS, 유튜브 등을 통해 하루에도 엄청난 양의 말이 쏟아지는 시대입니다. 그 많은 말 중에서 인생에 도움이 되는 건 얼마나 될까요. 그 많은 수다 중에서 내게 꼭 필요한 말은 몇 마디나 될까요. 필요하고 의미 있고 가치로운 말만 가려내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인 것 같습니다.


말을 하고 말을 듣는 데에도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쓸데 없는 말을 하고 들으면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는 것이죠. 정작 내 삶에 중요한 무언가에 집중하고 몰입해야 하는데, 다른 곳에 에너지 다 써버리니까 지치고 힘든 겁니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입 좀 다물어야 합니다. 누가 뭘 했다 하면 기어이 한 마디 얹어야 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기어코 한 마디 끼어들어야 하는, 그런 습성을 가진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냥 가만히, 조용히, 묵묵히, 묵직하게, 은근히, 차분하게, 고요하게 있어도 좋으련만. 어쩜 그리도 말을 하려 드는지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두 시간 강의를 마치고 나면 녹초가 됩니다.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는 듯합니다. 말할 때는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고, 특히 강의할 때는 열정까지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에 더 많이 지치게 됩니다. 시스템을 모두 끄고 나면, 의자 뒤에 등을 붙이고 깊게 심호흡을 합니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 집에 오면, 가장 먼저 노트북을 열어 글을 씁니다. 피곤한데 어떻게 또 글을 쓰냐고요? 말을 할 때는 에너지를 배출하기만 하지만, 글을 쓸 때는 에너지를 모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입을 다문 채 눈과 손가락만 사용합니다. 고요합니다. 집중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말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생각하지 못합니다.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일단 입부터 다물어야 합니다. 생각은 침묵에서 비롯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말 많은 사람은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이죠. 말만 많이 하는 사람은 깊이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 많이 하면서도 부지런히 행동하고 삶으로 보여주는 이가 있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 열정적인 사람, 부지런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오늘 제가 얘기하는 "말만 많은 사람"과는 구분되는 존재입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은 매우 적다는 사실이지요.


감옥에서 교도관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조용히 하세요!"입니다. 종일 그 말을 백 번은 들은 것 같습니다. 다들 사연이야 있겠지만, 어쨌든 그곳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은 말이 많았습니다. 수감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억울하다!"입니다.


죄를 짓고 수감되었기 때문에 말이 많은 걸까요? 아니면, 말이 많아서 인생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일까요? 말이 많으면 무조건 실수하게 됩니다. 술자리에서 허튼 소리와 실수 많이 하게 되는 것도, 술기운에 말이 많아지는 탓입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말, 남한테 실례 되는 말, 비밀을 지켜야 하는 말 등 이런 것들을 술김에 그냥 내뱉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지요.


싸움도 말로 비롯되고 오해도 말로 시작되고 감정도 말 때문에 불편해집니다. 그놈의 말이 문제입니다. 입을 다물고 말을 줄여야 합니다. 침묵이야말로 나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도구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 평생 입을 다문 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네, 당연합니다. 꼭 필요한 말만 하면 됩니다. 타인에게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말만 하면 됩니다. 스스로 삶의 긍지를 불러일으키고 존재 가치를 새길 수 있는 그런 말만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입 좀 다물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고요해지면, 어쩌면 가을이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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