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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장이 Oct 26. 2023

인생이 꼬인다 싶을 때, 문제는 "개인화"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바빠서 글을 쓸 시간이 부족하고, 겨우 책상 앞에 앉았는데 아이들이 칭얼거리고,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글을 썼으나 결국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를 하게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지요. "나는 왜 하는 일마다 꼬일까?"


말끝마다 투덜거리는 사람에게 왜 그리 부정적이냐고 물었더니, "저는 원래 성격이 좀 삐딱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사람에게 왜 그 동안 글을 쓰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니까, "저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이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회사에서 프로젝트 발표했는데, 팀장으로부터 욕을 먹었다."라고 말합니다.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 성격이 삐딱한 사람, 글을 못 쓰는 사람, 욕 먹는 사람...... 일상에서 대수롭지 않게 사용하는 이런 표현들이 모순 덩어리이며 바람직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하는 일마다 꼬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터무니 없는 말을 당연하게 하면서 사니까 일이 점점 더 꼬이는 것뿐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표현들은 모두 '개인화'에 해당합니다. 일종의 오류입니다. 어떤 일을 하면, 술술 잘 풀릴 때도 있고 연달아 꼬일 때도 있습니다. "~때도 있다"라는 말은 경험을 뜻합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 살아가다 보면 온갖 다양한 경험을 하게 마련이지요. 좋은 경험을 할 때는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인식하지 못합니다. 나쁜 경험을 할 때는 사사건건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느낄 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어떠한 경험을 했다" 혹은 "어떤 경험을 하는 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세 번이나 연달아 일이 꼬인 적 있어" 또는 "벌써 다섯 번이나 연속으로 일이 꼬이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말을 바꾸면 인생이 통째로 달라집니다. 생각과 말을 반복하면 무의식에 입력 되고, 무의식이 변화하면 인생 변화와 성장은 더 볼 것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나 일시적 경험을 마치 "자신"인 것처럼 인식하는 오류를 범합니다. 경험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그 경험을 하는 것이죠. 주체가 '나'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경험을 자신으로 착각하는 사람은 끌려다니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나'를 주체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주도적 인생을 누릴 수 있고요. 


강사가 수강생을 열심히 모집했는데, 두 명밖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대부분 강사는 힘이 쭉 빠진 채 "겨우 두 명밖에 오지 않았다"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금방 생각을 바꿨지요. "오늘은 두 사람에게 내 모든 걸 전하는 날이다!" 두 문장의 주어가 다릅니다. 앞 문장의 주어는 '수강생'입니다. 뒷 문장의 주어는 '나'입니다. 수강생이 주어인 인생은 내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주어인 인생은 내가 통제할 수 있습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이 행복과 성공을 이루는 태도입니다. 


"수강생이 적다"는 사실은 외부 사건이며 '일어난' 일입니다. 사람은 외부 사건이나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비가 오는 걸 막을 수도 없고, 이미 쏟아지고 있는 비를 멈추게 할 방법도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일에 매달려 징징거리는 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산 딱 준비해서 펼쳐들고 당당하게 걷는 것이죠. 


원래 성격이 삐딱하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원래"라는 건 정확히 언제를 뜻하는 건가요. 사전에서 "원래"의 뜻을 찾아 보니 "사물이 전하여 내려온 그 처음"이라고 정의 되어 있네요. 그렇다면, 원래 성격이 삐딱하다는 말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성격이 삐딱했다는 뜻이 됩니다. 엄마다 들으면 미역국 토해낼 일이지요. 


내가 삐딱한 말을 했군요.

내가 삐딱한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언제든 주체를 '나'로 인식해야 합니다. "원래 삐딱하다"고 말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회피이자 도망이지요. 세상 가장 비겁한 변명입니다. 주어를 "나"로 인식하는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가 시작 되는 겁니다. 


세상에 "글을 못 쓰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못 쓴다고 내일도 못 쓰나요? 앞으로 영원히 못 쓸 건가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이 제로입니까? 여기 도토리 한 알이 있습니다. 땅에 묻고 때를 기다리면 엄청난 크기의 떡갈나무로 성장하겠지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지극히 마땅한 현상이자 사실입니다. 그런데, 도토리가 맨날 "난 작은 존재라서 용기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습니까. 


글을 써 본 경험이 없고 제대로 배운 적도 없어서 당장은 실력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지금보다 나은 글을 쓰겠어!


경험은 경험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경험을 정체성으로 오해하고 자꾸만 개인화 하니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런 사람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것입니다. 이 또한 회피이며 도망입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성과 합리화. 삶을 망치는 최고 방법이지요. 


회사에서 프로젝트 발표했는데, 팀장한테서 욕을 먹었다...... 누가 욕 먹은 건가요? 내가 욕 먹은 겁니까? 아니면, 프로젝트가 욕 먹은 겁니까? 내가 왜 욕을 먹습니까? 나는 밥을 먹어야지요. 팀장이 욕을 했다면, 그것은 프로젝트에 관한 평가에 불과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팀장은 아마 '욕'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어떤 팀장이 회의 시간에 프로젝트 발표하는데 "씨발"이라고 하겠습니까. 호되게 지적을 하고, 비판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라리며 다시 하라고 지시했을 테지요. 


그럼 다시 하면 됩니다. 힘들고 어렵고 시간 더 많이 걸리고 야근도 해야겠지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다시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어쩌면, 다름 프로젝트 발표 시간에는 칭찬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고요. 


나는 '욕을 먹은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프로젝트를 완전하게 수행하지 못한 경험'을 했을 뿐입니다. 경험은 바꿀 수 있습니다. 주체인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하기에 따라 나쁜 경험을 좋은 경험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지를 갖고 다시 도전하여 좋은 경험을 많이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자빠져 신음하며 자신을 못난 인간으로 정의하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선택입니다.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위대한 내가, 온갖 다양한 경험을 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내가 겪는 경험의 종류가 다양할 뿐이죠. 전과자 파산자 알코올 중독자를 '실패자'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별 경험을 다 해 보았다"로 인식했을 뿐입니다. 개인화를 없애고 경험으로 인식하는 순간, 저는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지금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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