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문방구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학교 정문 앞에는 문방구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희미한 기억 되짚어 보면, 어림잡아도 9~10개는 되었던 것 같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꼬마의 촘촘걸음으로 약 20분쯤 걸렸다. 몸집보다 큰 가방을 메고 신발주머니까지 한 손에 든 채 매일 아침 등교했다. 당시 한 학급 학생 수는 55명~65명 정도였다. 칠판에서 교실 뒷벽까지 책상과 의자가 빼곡했다.
거의 매일 준비물이 있었다. 등교길에 문방구에 들러 필요한 것들을 샀는데, 내가 단골로 이용했던 곳은 "우리 문방구"였다. 아직도 그 이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주인 아주머니는 덩치가 좋았다. 펑퍼짐한 몸에 어울리는 푸근한 인상이었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더라면 지금도 그 아주머니 얼굴을 선명하게 그릴 자신이 있다. 아저씨는 빼빼 말랐고 얼굴이 새카맣게 그을려 자칫 태국이나 필리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이고, 우리 은대 왔나! 뭐 주꼬?"
또래 아이들보다 키도 몸집도 작았다. 문방구 앞을 지날 때면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늘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딱히 살 게 없는 날에도 문방구 앞에서는 자연스레 발걸음을 멈추곤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당시 제법 잘 사는 친구 집에서 비디오로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무술 영화였다. 주인공이 쌍절곤을 휘휘 돌리며 악당(?)들과 싸우는 장면에서 난 그만 혼을 놓고 말았다. 엄마를 졸랐다. "나 쌍절곤 하나 사줘!"
초등학교 4학년짜리 아이가 무시무시한 무기를 사달라고 졸랐으니 쉽게 허락해줄 리 없었다. 며칠을 시위했다. 누구나 그랬겠지만, 당시 나는 공부를 좀 했다. 반 석차는 거의 1,2등을 다투었고 전교 석차도 상위권이었다. 한 반에 50명씩만 잡아도 12개 학급이면 600명이 넘는다. 성적과 등수로 엄마를 설득하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천 원짜리 다섯 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
뛰다시피 "우리 문방구"에 가서 물었다. 이게 웬일인가! 쌍절곤이 없단다. 영화 속 주인공이 되기 위해 며칠을 울고불며 엄마를 졸라 겨우 돈을 받아냈는데, 문방구에 쌍절곤이 없다니. 절망과 좌절 속에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줌마가 알아 보고 며칠 내로 쌍절곤 구해 놓을게."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 정문을 향해 가는데, 뭔가 눈에 확 들어왔다. 정문 바로 앞에 자리잡은 "학생사"라는 대형 문방구에 쌍절곤 몇 개가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다. "학생사"에서 쌍절곤을 샀다. 가방에 넣고 등교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선생님 눈을 피해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이리저리 돌리는 시늉도 하고,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서 영화 주인공 흉내도 냈다. 친구들은 부러워했고, 나는 자랑스러워했다. 누구든 시비를 걸기만 하면 싹 다 때려눕힐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나는 마음 주체하기 힘들었다. 수업 마치고 가방을 싸면서 쌍절곤은 넣지 않았다. 기세 등등하게 손에 쥐고 교실을 나섰다.
학교 정문을 나와 집으로 향하는데, "우리 문방구" 아줌마가 내 손에 쥐어 있던 쌍절곤을 보았다. 분명 오늘 아침에 쌍절곤 구해주겠다 약속을 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다른 문방구에서 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고, 은대 니 참말로 너무한데이. 아줌마가 좋은 걸로 구해주겠다꼬 약속했다 아이가. 고걸 못 참고 딴 데서 사뿟나. 니는 배신자다 배신자!"
좀 전까지 느끼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집으로 걸어가는 20분 동안 내 머릿속에는 '배신자'라는 단어만 계속 맴돌았다. 후회 막심했다. 며칠만 기다리면 될 일을. "우리 문방구" 아줌마에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만 같았다. 더 큰 걱정은, 내일부터 계속 등교할 때마다 "우리 문방구" 아줌마와 아저씨를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다음 날에는 쌍절곤을 집에다 두고 등교했다. 더 이상 쌍절곤이 즐겁지 않았다. 콩알만해진 가슴을 안고 "우리 문방구" 앞을 지나는 순간, 아줌마가 큰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은대야! 일로 온나. 이거 묵고 가그라!"
삶을 계란을 세 개씩이나 내 품에 안겨주었다.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계란을 많이 삶았다면서 나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멍하니 받아들고 학교 정문을 통과했다. "우리 문방구" 아줌마는 배신자에게도 계란을 주시는구나. 가슴이 찡하다는 표현을 그때 처음 알았다.
초등학교 졸업 후 16년쯤 지났을 때, 당시 유행하던 '아이러브스쿨' 카페를 통해 초등 동창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모교를 방문하는 느낌이 새로웠다. "우리 문방구"는 그대로 있었다. 아저씨는 예전보다 훨씬 말랐고 얼굴도 더 새카맣게 탄 것 같았다. 나를 알아보시고는, "은대가? 은대 맞나? 아이고, 몰라보겠데이. 멋있게 컸네!"
아줌마가 보이지 않았다. 얼굴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아저씨 말로는 몸이 좋지 않아 문방구 일 그만두고 집에서 쉰다고 했다. 안부 전해주시라고 부탁하고는 아쉬움 가득 안고 돌아섰다. 그 후에도 몇 번 초등학교 근처에 가 본 적 있다. 사업 실패 후 모든 것을 잃었을 때, 죽기로 작정하고 어린 시절 한 번 보듬고 싶어서 갔던 날. "우리 문방구"는 그 자리에 없었다. 학교 정문 앞을 가득 채웠던 그 많은 문방구는 모두 사라졌다. 정문 앞에 세련된 서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백화점처럼 온갖 것을 다 팔고 있었다. 학생 수가 확 줄었으니, 문방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할 테지.
아무리 둘러봐도 불량식품 사 먹을 곳은 없었다. 쌍절곤도 팔지 않았다. "은대야! 일로 온나!" 아줌마와 아저씨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고 계실까. 살아 계시기는 할까.
초등학교 4학년이던 꼬마 아이는 이제 머리가 희끗하다. 그 시절 '배신자'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 식당도 한 곳만 이용하고 강의장도 한 곳만 사용하고 출판사도 한 곳과만 계약한다. "우리 문방구"가 보고 싶다.
지금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