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농도가 사라져 버린 순간
빈곤의 계절
김미진
때때로 밀려오는 감정의 빈곤 앞에서 무너질 때가 있다. 마음의 방 언저리에 먼지가 가라앉듯 조용한 적막만 가득하고, 나는 그 적막 속에서 나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을 때가 있다.
희로애락의 빛들이 흐릿해지고, 감정의 농도가 사라져 버린 순간에는 마치 세계가 나를 비켜 흐르는 듯한 외로운 착각에 빠져든다. 손끝으로 삶을 붙잡으려 해도, 허공만 움켜쥐다가 이내 손을 털며 멈춰 서게 되는 날들이 있다. 그럴 때마다 나의 감정이 왜 이렇게 말라버렸는지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일상의 소란 때문인지, 너무 많은 역할을 감당하며 나를 잃어버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래된 상처의 잔해가 깊은 곳에서 다시 들썩이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수록 더 큰 빈곤이 덮쳐 오고, 나는 대답을 얻지 못한 채 그 무게를 견뎌야만 한다.
감정도 계절을 타는 걸까. 봄처럼 벅차오르고 여름처럼 뜨겁게 빛나는 날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계절은 너무 길게 머무는 겨울처럼 차갑고 고요하다. 문제는 그 겨울이 찾아올 때마다 내가 쉽게 무너진다는 데 있다. 마치 감정을 잃어버린 내가 세상에서 제외된 낙엽 조각처럼 느껴지고, 살아 있다는 실감마저 흐려진다. 마음의 체온이 서서히 낮아지며, 끝내 조용한 밤처럼 고요한 침묵만이 나를 덮는다.
나는 오랫동안 감정이 풍부해야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감정이 줄어드는 날이면 스스로를 책망했고, 공허함이 찾아오면 무언가 잘못 살아온 듯한 불안이 나를 엄습했다. 하지만 정작 그 불안이야말로 내가 나를 몰아붙이며 지쳐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표식이었다.
감정의 빈곤은 고갈이 아니라 쉼이었다. 마음이 다시 숨을 들이쉬기 위해 잠시 내쉬는 과정, 새 꽃을 피우기 위해 흙이 얼어붙는 겨울의 시간처럼. 얼어붙음 속에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의 전조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배운다.
한동안 나는 내 감정이 멎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멎은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그동안 흘러온 길을 되돌아보며 천천히 움직임을 조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간의 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이가 있어, 그 깊이에 가라앉아 있는 감정들이 때마다 떠올라 닿기도 하고,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나는 그 흐름의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늘 그 흐름을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무너짐은 부재가 아니라 나의 내면이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찾기 위한 과정임을 서서히 인정하려 한다. 텅 비어 보이는 시간 속에도 아주 미세한 회복의 결이 숨어 있다. 그 결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얇고 투명하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조용히 나를 지탱하고 있다. 따뜻한 빛이 들지 않던 창가에도 어느 날 아침 햇살이 조심스럽게 스며들 듯, 마음도 언젠가 감정을 다시 품을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단단하다고 믿었던 감정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을 때, 그 속에서 오래된 상처의 잔해를 마주한다. 억누른 슬픔의 그림자들이 고요한 빈곤의 순간에 얼굴을 들이민다. 감정의 공백은 어쩌면 이 잔해들을 하나씩 비춰보며 정리하는 시간이다. 그 시간을 외면하려 했지만 결국 그 시간이 나를 더 단단하게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감정의 빈곤 앞에 흔들리는 나를 이제는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 바닥처럼 느껴지는 그곳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아주 느린 속도로 나를 다시 세워 올린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회복의 가장 작은 움직임을 이제라도 내가 먼저 알아봐 주고 다독거려야 하지 않을까.
감정이 고요해진다는 것은 내가 무너졌다는 뜻이 아니라, 마음의 저 깊은 곳에서 새로운 결들이 재배열되고 있다는 신호다. 동틀 무렵, 가장 희미한 여명이 어둠을 깨뜨리듯, 나의 빈곤도 언젠가 아주 천천히 새 빛을 드러낼 것이다.
무너지는 순간이야말로 다시 살아낼 힘을 아주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시간일 것이다. 무너짐 속에서만 들리는 미세한 심장의 떨림이 있고, 침묵 속에서만 알 수 있는 나의 진짜 목소리가 있다. 감정이 비어 있는 지금의 나도, 결국엔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데려가기 위한 준비일지도 모른다.
비어 있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감정이 앉을자리를 마련하는 일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의 침묵은 나에게 다시 한번 살아갈 방향을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다시 마음이 빛을 품는 날, 오늘의 이 고요함이 얼마나 귀한 여백이었는지 분명 깨닫게 될 것이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 아직 미약한 온기가 남아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온기가 언젠가 빈곤의 계절을 바꾸듯 마음 깊은 곳에서 자라나기를 바라며, 아주 조금씩 나의 내면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