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바람의 흔적
문경시 주흘산 자락에 자리한 정민호 경주문예대학 원장님의 <문학정원>(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3길 4)에 초대를 받아 길을 나선다. 2023년 <문경새재, 바람의 흔적>으로 문경문학상 시 우수상을 받고 뛸 듯이 좋아했던 막내 여동생 수현이. 옷이며, 구두며, 챙겨놓고 건강이 악화되어 상도 받으러 가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된 그 이름 하나. 내 마음은 먼저 그곳에 도착해 있었지만, 내비게이션의 잘못된 길 안내로 주흘산 자락 골짜기를 두 시간 넘게 헤맨 끝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산들과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은 오래된 풍경을 바라보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정원의 진돗개 한 마리가 반갑다며 혀를 길게 내밀고 꼬리를 흔든다. 그 기분 좋은 환대 앞에서, 처음 오는 이곳이 왠지 낯설지 않다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작년에 이어 어느덧 세 번째 문경 방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마음 한켠이 촉촉이 젖어든다. 수현이는 지금쯤 어느 산자락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까. 주흘산과 능선 어딘가에서 바람에 섞여 나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날 선 그리움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신대원 선생님은 커다란 시비 옆에 가지고 온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옆에서 지켜보시던 원장님의 사위께서 흙을 고르고, 뿌리를 눌러주며, 천천히 흙을 덮는 손길이 정성스럽고 조심스러웠다. 전남원 선생님과 나는 그 작은 소나무 앞에 서서, 소나무가 잘 자라주기를 바라며 기념사진 한 장을 남겼다.
나무를 심은 후, 원장님의 모든 발자취를 모아두신 책방에 들어가 책들을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한 권 한 권이 쌓아 올린 시간들 속에서,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그 사이사이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잔잔히 스며든다.
한 편의 시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시가 태어난 시간과 추억, 그리고 한 사람의 생을 오롯이 읽는 일인지도 모른다.
1939년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에서 태어나 한학을 익히며 선비의 몸가짐을 먼저 배웠던 정민호 원장님은, 1966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을 통해 문단에 나와 절제된 언어로 자신의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한국문학상, 한국펜문학상, 경북문화상, 그리고 녹조근정훈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문학적 여정은 길고 단단하다.
깨어있는 밤
정민호
촛불을 켜고
나는 밤새껏 깨어 있으리라
절체절명의 도전으로도
인생은 지나가고 세월만 남는다.
이슬이 내리고 저녁이 오면
작은 집에 촛불 하나 켜지고
아직 찾지 못한 시가 하나 남아
온 밤을 촛불을 향해 끙끙 울어 주리라.
촛불을 켜고 밤새 깨어 있으려는 한 시인의 다짐과 삶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고집이 담겨 있다. "절체절명의 도전으로도 인생은 지나가고 세월만 남는다"는 구절 앞에서, 우리는 결국 시간 앞에 서 있는 존재임을 조용히 깨닫게 된다.
작은 집, 촛불 하나, 그리고 아직 찾지 못하고, 끝내 완성하지 못한 그 무엇을 향해, 촛불을 향해 울음을 건넨다. 그 울음은 무너짐이 아니라 버팀이리라. 호스피스 병동에 누워 꺼질 듯 흔들리는 불빛을 향해 끝까지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내 막내 여동생처럼. 어쩌면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것만이 곧 살아있다는 유일한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학을 통해 영격지수가 올라갔다며, 끝내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그 아이.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애간장만 태우던 날들.. 끝내 찾으려던 한 편의 시는 모든 두려움을 글로 승화하려던 마지막 몸부림이었으리라. 떠나는 자신보다 남은 이들이 슬퍼하지 않기를 바랐던 그 속 깊은 마음, 그 잔잔한 배려가, 어쩌면 깨어 있는 이 시간 찰나 속에서도 나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문학정원을 모두 둘러본 후, 정민호 원장님의 따님 부부께서 미리 예약해 놓은 꽃봉오리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 겸 저녁을 함께 먹었다. 맛있는 명품 오리주물럭과 맥주 한 잔에 기분 좋은 웃음이 오고 갔다. 내 마음 한켠은 여전히 문경의 바람 속을 이리저리 맴돌고 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학정원에 심어놓은 작고 여린 소나무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 작고 여린 소나무는 이제 비를 맞고, 바람을 견디며, 계절을 지나는 동안 조금씩 자라날 것이다.
<문학정원>은 여전히 문학의 촛불을 태우며 문경의 밤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 불빛 속을 더듬으며 하늘의 별이 된 그 아이의 이름을 조용히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