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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bu Dec 17. 2023

화해

나는 늘 뭐든지 잘 잊어버리는 내 성격이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었던 시간들을 지내고도 아무렇지 않게 나아가려면 기억 저편으로 치워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일 남눈치보기 바빴던 중고등학교 생활과, 유학생으로서 무력하고 두려웠던 코로나 기간, 끊임없이 살을 빼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섭식장애를 겪었던 일 년의 다이어트 기간이 모든 것을 지나면서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걸 잊어버렸다. 혹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뎌진다는 좋은 말로 포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점점 더 회의적이고 시니컬하게 변했다. 꿈과 희망 따위 허울 좋은 망상이며, 현실은 현실이고, 세상은 결국 누구의 사정도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믿었다. 난 이게 어른이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근데 요즘 문득 내가 어릴 때 가장 경계하던 어른의 모습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참 슬프다.


사람이 어려운 시간을 견딘 후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닫고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모든 일에 회의적인 태도로 대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욱 강한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시간과 나를 분리할 줄 아는 것이다. 나에게는 아직 후자가 가능할 만큼 마음의 근육이 없어서 전자의 방식으로 살아왔던 것 같다. 하나씩 해치우고 또 잊어버리는..


그런데 저쪽으로 치워 버리는 순간 그 기억들에는 더욱 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실제보다 더 나쁘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래서 감정은 모름지기 날 것 그대로 꺼내서 정면으로 마주보고 나서 제대로 놓아 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 과거와 아직 제대로 이별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었던 시간이 안 힘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도 그 감정들이 기억날 만큼 정말로 두렵고, 낯설고, 어려웠다. 그 사실을 억지로 미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반대로 그 때의 감정을 지금까지 끌고 와서 고통받을 이유도 없다. 나를 힘들게 했던 세상을 용서하고, 그 때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나를 용서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나는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떠한 응어리도 없이 행복하게 다음 인생을 구상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꿈을 다시 허락하려고 한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뭔지, 꿈을 꾸는 사람으로서 이루고 싶은 대의가 뭔지 고민해보려고 한다. 어려움을 겪고도 희망을 갖는 건 어리석은 짓이 아니라 현명한 일이다. 앞으로도 숱한 어려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꿈을 향해 가는 내가 되고 싶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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