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이상 예전의 '광년이'는 없다..
아이를 여럿 낳아 길렀다만 육아는 내게 두려움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돌 이전의 아이를 기르는 일이. 돌 이전은 특히 더 어려웠다. 토막잠도 힘겹던 불면의 밤과 이유식을 떠먹이던 아기 스푼이 천근같이 느껴지던 일 따위는 시간의 세례를 받고도 도저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지 못했다. 영영 힘들고 버겁고 답답한 시간인 채로 남았다.
첫째는 유난히 많이 우는 아이였다. 젖과 분유를 줘도, 안고 있어도 내리 울기만 했다.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으니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갔다. 거의 일주일 만에 샤워다운 샤워를 하면서 행복도 잠시, 곧 화장실 밖을 나가야 한다는 사실에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연하다.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인간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순리로 이뤄지는 일인데 이렇게 못 견디게 힘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방법을 찾고 싶어 접속한 카페에는 나와 상황이 다른 글이 많았다. 아이가 점점 편해져 간다는 엄마들의 간증을 보면 마음이 무너졌다. 그녀들에게 별다른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스스로’ 해낸다고 했다.
밤잠 자는 시간이 길어지는 ‘백일의 기적’이 내게는 하루도 오지 않았다. 누구는 50일의 기적도 온다던데. 나만 나쁜 패를 받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스스로 초래하지 않은 ‘불운’을 맞닥뜨린 적이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아이에게 불운이라는 표현을 쓰는 게 적절하지는 않지만, 무작위로 찾아온 어려움을 수용하고 묵묵히 헤쳐나가 본 적이 기억에는 없다. 물론 이것도 다 지나간 뒤 붙이는 해석일 뿐이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라는 위로가 와닿지 않았다. 평소 신뢰하는 선배에게 물어봤다. 그녀는 그 시간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다고 할 뿐이었다. 마지막 동아줄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곤경에 처할 때마다 내게 해결책을 제시해 주던 이가 그냥 참으라고만 하다니. 구체적으로 얼마 동안 참으면 된다는 건지, 나는 한나절도 버티기 힘들다고 속으로 되뇌었다.
해결책을 직접 찾아야 했다. 친정엄마가 계셨지만 엄마도 아이 돌보는 게 생경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기는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우느냐며 난감해했다. 나와 아이 관련 집안일에 열성을 다하는 방식으로 도울 뿐이었다. 남편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떨어져 지내던 시기였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공부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튜브가 활성화되지 않아 책을 기본삼아 공부했다. 수면의식, 백색소음, 먹놀잠(먹고 놀고 잠자는 아이의 패턴) 같은 용어를 알아갔다.
개념은 개념일 뿐이었다. 내 아이에게는 잘 적용되지 않았다. 덜 알았거나 잘못 실행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넓게, 더 열심히 했다. 어떤 날은 책에서 말한 내용에 조금 근접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한 발 나아갔다 다시 퇴행하기를 반복했다. 연구자 같은 마음으로 일상을 살았다.
밑에 아이는 첫째와 비교하면 순했다. 하지만 쌍둥이였기에 아무리 순해도 울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산후관리사님이 퇴근한 뒤 아이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는 일을 똑같이 두 번 하다 보면 쉴 틈이 없었다. 타이밍이 겹쳐 동시에 울기라도 하면 머릿속 퓨즈가 나가버릴 것 같았다. 또 공부를 시작했다. 쌍둥이를 돌보는 비법이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내용을 다루는 책 같은 건 없어서 이번에는 인터넷에 오롯이 의지했다. 카페와 블로그를 돌아다니며 다른 아기들의 하루를 들여다봤고, 나를 구원해줄 육아 아이템을 찾느라 쇼핑몰을 헤맸다.
육아가 관찰과 실험을 닮아갔다. 아이에 대해 공부하고 전문가가 제시하는 대로 아이의 일상을 영위하려 했다. 그 과정에 ‘호흡’은 없었다. 자연스럽고 무의식적으로도 해낼 수 있는 흐름은 없었고 온통 쟁취해내야 하는 것들이었다. 노력을 게을리하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고 믿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니 육아가 어렵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넷째를 낳고는 더 이상 남들의 육아가 궁금하지 않다. 내 아이가 순한 아이인지 아닌지 확인해보려 하지 않는다. (솔직히 순한 아이는 맞는 것 같다만..) 아직 백일이 되지 않아 백일의 기적이 올지 안 올지 알 수는 없지만 기적이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까지 말못하지만 적어도 마음이 무너지거나 억울하지는 않다. 경력직의 여유와 다둥이 엄마의 짬 때문이 아니다. ‘해봤으니 다 알아’ 하는 자신감 (혹은 오만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다.
언어로 정교하게 빚어내 표현하기 힘든 그 물컹거리는 마음이 뭔지 찬찬히 기록하고 싶다. ‘다시 쓰는 육아일지’는 육아에 관한 마지막 기록이다. 이전에 제대로 된 일지를 쓴 적은 없지만, 그때의 감정을 글로 엮었다면 억울함과 힘듦의 바탕에 기쁨이 번져있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두 돌 이전과 이후의 무드가 같지는 않겠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예전 모습의 변주에 머무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피어난다. 나는 이번 육아일지가 애틋함의 기반 위에서 쓰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