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너그러울 수 없다'
육아 11년 차에서 돌아보니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쌍둥이가 어린이집에 가기 전이었다. 시기를 조금 더 좁히면 걷기 전쯤이었다. 통잠을 자는가 싶더니 한밤중에 일어나 나를 몇 번을 깨우고, 통잠을 진짜 자네 싶으면 새벽 5시쯤 일어나 종달 기상으로 혼을 뺐다. 많은 엄마가 이쯤에서 ‘나를 잃어간다’라는 기분 때문에 괴롭다. 나는 아이의 기질과 발달 단계에 온전히 종속된 존재다. 수형인들이 통제된 일과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처지를 새로 인식하듯, 먹고 자고 싸는 당연한 일이 눈치 보고 겨우 처리하는 과업이 되며 자신을 잃어가게 됐다.
자신을 잃어간다는 건 뭘까. 잃었다는 건 제대로 가지고 있던 상태를 전제한다. 육아로 자신을 잃기 전의 내 자신은 어떤 것이었나. 본래의 모습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되지 않았다. 잃어서 이렇게 슬퍼하고 힘들 만하려면 대단한 걸 가졌어야 하는데, 콕 집어 그게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어떤 가능성이 꺾였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를 잃은 기분’ 같은 것은 산후 우울감의 동의어로 해석하는 자들도 있었다. 뭘 모르는 소리라고 겉으로는 화를 냈지만, 솔직히 나조차도 자신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별 볼 일 없었는데 애 때문에 대단한 미래가 꺾인 것처럼 핑계 대는 걸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몸이 가장 힘들 때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에 제일 집착했던 것 같다. 필사적으로 글을 썼다. 내가 ‘쓰는 인간’임을 스스로 규정하고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이를 시간제 보육 어린이집에 맡기고 얻은 2시간 동안 졸면서 글을 썼다. 육아하며 드러난 후진 모습에 대한 자기 비하와 내 고통을 아랑곳 안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억압과 분노로 생채기 난 마음에서 나오는 언어는 제대로 글이 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조건 썼다. 안 그러면 나였던 내가 정말로 사라질 것 같았다. 토해내듯 쓴 글은 보통 이주일쯤 묵혔다 다시 봤는데, 대부분 경악스러운 수준이었다. 이렇게 못 쓰는 게 나라니. 과잉된 감정을 실은 부정확한 문장들은 의미 전달이라는 글의 본 기능도 해내지 못했다. 언젠가 이 글로 뭔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이를테면 출판 같은 것들) 내심 기대했는데 내게 남은 건 수치뿐이었다. 성격도 더러운데 글까지 제대로 못 써서 슬펐다. 엉망진창인 나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갑갑했다.
지금에 와서, 또 결과적으로 보면 다른 관점이 보인다. 몸이 힘들 때 마음이 나약해지는 건 몸뚱이를 건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이다. 나를 그렇게 닦달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왜 뭔가를 보여주려고 그렇게 아등바등했던지. 별 생각 안 하고 예능을 보며 낄낄거리는 편이 회복에 더 도움 됐을 것이다. 그때의 시간과 글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해도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럽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다독여주지 못했다.
스스로에게 관대하지 못하면 아이에게도 너그러울 수 없다. 통잠 자지 않는 아이, 낮잠을 토끼잠으로 자서 종일 찡찡대는 아이를 ‘원래 그런가 보다’ 여기지 못하고 ‘왜 이 개월 수에 그걸 못 하는 거지’ 하는 생각에 붙들렸다. 쓰고 나니 또 자책이다. 사고의 흐름은 대개 해내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안 그러려고 해도 달성과 좌절의 잣대로 자꾸 나를 평가한다. 그래서 ‘자신’을 정의 내릴 때도 성과물에 빗대야 했다. 애초에 자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추상성의 극치 아니던가. 타이틀이나 과업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는 믿음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그것 외에 다른 세계는 없는 것처럼 보이니 인생을 혹독하게 대한다.
마지막 육아에서는 한결 느슨하다.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도전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뭔가가 되기 위해 매진하지 않는 게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까, 이렇게 눌러앉아 꺾이는 것일까. 그게 사실이면 마냥 슬퍼해야 할 일인가. 물론 넷째가 초등학교 갈 즘, 그러니까 이제 전투 육아에서 졸업하나 싶을 때 생물학적 갱년기에 돌입한다는 건 조금 서글프다만 그게 순리라면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지난달에는 애들을 재우고 밤에 혼자 영화를 한 편 봤다. 10년 전 첫째를 키울 때하고 처음 해보는 일이다. 그동안은 영화 한 편 보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 시간에 차라리 책을 보지, 잠을 자서 컨디션을 조절하지 해놓고 결국에는 유튜브나 봤다. ‘영화 한 편 보는 게 뭐 어때’ 하며 새벽 1시까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봤다. 영화를 다 보고 자신을 찾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있음’은 증명보다는 체험에 가까운 영역이었다. 그간 좁은 길과 가시밭길에서 인생의 정수가 나온다고 믿었다. 조금 고되게 사는 게 값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나를 슬프게 하는 강박일 수 있다고 이제는 조금씩 의심한다. 내려놓으니 많은 것이 제법 편해졌다. 막내를 키우는 일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