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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타쿠나 Apr 23. 2024

[함께읽자] 사랑은 들어주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코리 도어펠드 <가만히 들어주었어>


돌이켜보면 좀 극성스러운 엄마였나 싶다. 나는 첫째가 신생아일 때 벌써 데이지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줬다. 데이지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다. 당시의 나는 3~4시간 마다 수유를 해서 까무룩 잠들면 다시 눈뜨는 게 더 고통이었다. 개츠비는 깨어있으려고 든 책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음성을 묘사한 문장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녀의 목소리는 ‘귀가 따라가며 알아서 맞춰 들어야 될 것 같’은 것이었다.

소설가 김영하 번역 판을 봤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옥구슬처럼 굴러다닌다.


 어떤 갈망은 무의식에 크게 자리잡아도 적확한 표현을 만나기 전까지 형상화되지 않는다. 나는 이 문장을 만나고서야 깊고 강렬한 갈망을 비로소 확인하게 됐다. 사람들이 내 목소리를 들어주는 것, 호소하지 않아도 당연한듯 귀기울여 주는 것. 데이지는 그 소망을 실현한 형상이다. 말을 뱉을 때마다 이게 헛소리는 아닐지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내용이 아니라 목소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갓난쟁이에게 욕망을 투사하는 엄마였다.(당시에는 몰랐지만) 


유치원 갈 나이가 되자 엄마는 등록 원서에 Daisy라는 이름을 써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계획이 다 있었다. 이름처럼 살려면 매혹적인 조건을 갖춰 나가야 한다. 학벌과 직업은 주목과 관심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었다. 영어는 데이지로 가는 첫 관문이었다.


하지만, 엄마의 순진한 생각은 얼마 안 돼 박살나고 말았다. 매력을 갖춰 진짜 데이지가 되는 길은 끝이 없어보였다. 세상의 기준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였다. 이만하면 잘하지 싶은 순간 위를 보면 저만치 앞서나가는 다른 친구들이 보였다. 설사 가장 뛰어난 자질을 갖춘다고 한들, 사랑받는 존재가 될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있을까. 잘나고 멋져져서 사랑 받겠다는 포부는 그 얼마나 부질없는지. 하긴, 소설 속 데이지는 허영과 속물근성의 산물이었고 그런 데이지를 얻으려고 인생을 건 개츠비도 한여름밤의 꿈처럼 덧없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애정은 끌어당김이 아니고 준 것을 되돌려받는 성격에 가깝다. 나는 그것을 아이가 쓴 글을 통해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는 좋아하는 친구를 쓰는 글쓰기 숙제에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A라는 친구가 좋다고 썼다. 그 친구가 예쁘고 똑똑해서 좋은 게 아니었다. 딸 아이에게 경청으로 보여준 애정을 돌려받았을 뿐이다. 문득 아이에게 잘 듣는 법을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자신의 세계를 팽창시키는 데만 집중해 다른 사람의 세계로 진입하는 문제를 소홀히 했다. 


<사랑의 기술>: 사랑은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이런 생각의 전환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 같다. 그가 <사랑의 기술>에서 주창하는 바와 결이 같기 때문이다. 그는 현대인의 사랑이 필연적 실패인 이유를 사랑을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받는’ 문제로 바라보기 때문이고 했다. 사랑이 ‘받는’ 문제가 되면 어떻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사랑스러워질 수 있는지에 골몰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데이지라는 이름에 투영했던 욕망의 실체였다. 그렇게 되면 사랑의 행위는 나를 가꾸는 문제가 된다. 다이어트와 성형을 하고 돈을 더 많이 벌어 사랑을 ‘쟁취’하려 할 것이다. 자신의 안녕을 타인의 손에 맡기는 격이다. 상대가 주는 사랑에 일희일비 하며 메이게 되니 말이다.

신판의 디자인은 낭만적으로 느껴진다.


사랑을 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잘 듣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나를 정비하지도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수용할 뿐이다. 진심으로 듣는 일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애정이다. 


문제는 실천이 참 어렵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가만히 듣는 게 어렵고, 내 얘기를 더 하고 싶고, 네 말 속에서 듣고 싶은 건 나에 관한 얘기일까. 상대방의 말을 듣다가 ‘해결책’을 내놓는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라고는 한다. 너를 위한다는 명분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위함이다. 그렇다, 나를 온전히 내어주며 듣는 일은 일생의 과업이다. 에리히 프롬은 ‘준다’는 행위에 관한 광범위한 오해가 주는 사랑의 실현을 더 힘들게 한다고 봤다. 사람들은 흔히 주는 행위를 포기하고 빼앗기고 희생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주고 받는 교환 없이 주기만 하는 행동은 ‘사기’ 당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경향을 그는 시장형 성격이라고 했다.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이 태도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주는 행위를 통해 변해가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준 사람은 받는 사람의 생명에 특별한 무엇인가를 불러일으키고, 그렇게 야기된 것은 다시 처음 준 사람에게 되돌아온다고 했다. 경이로운 점은 되돌아온 사랑은 처음의 모습과 달라졌다는 것이다. 풍요와 생동과 기쁨을 통과하며 화학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일과도 같다.


<가만히 들어주었어> - 네 시간의 기준을 기꺼이 따르리


남의 말 자르지 않고 끝까지 듣는 것으로도 인정(?)받는 우리 사회에서는 잘 듣는 법을 배우기가 쉽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 모를 때 그림책은 뜻밖의 스승이 된다. <가만히 들어주었어>는 듣기의 본질을 관통한다. 주인공 꼬마 테일러는 자기가 쌓은 블럭이 무너지자 크게 상심한다. 여러 동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 자기에게 털어놓으라고 부추기고, 포효하듯 감정을 분출하라고 조언하며, 대신 해결해주겠다고 나서기도 한다. 그럴듯한 해결법에도 꿈쩍않던 아이를 움직인 건 말없는 토끼다. 토끼는 그저 몸을 맞대고 아이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마침내 말할 준비가 된 아이는 토끼에게 응어리진 감정을 쏟아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현대철학이 천착한 듣기의 윤리를 간명하게 풀어낸다면...이 그림책이 아닐까.



잘 들어준다는 건 결국 너를 껴안는다는 말이다. 무슨 말을 하든, 그 말을 듣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든 네 기준에 맞춘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아를 내려놓는 일종의 수행이다. 죽었다 깨어나도 네 마음과 상황을 완전히 알 수 없으니(‘재현 불가능성’) 그저 들으며 마음을 다시 세울 때까지 곁을 지키는 게 최선이라 여길 뿐이다. 이런 듣기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 아닐까, 그렇게 사랑을 주며 매 사랑 마다 다시 태어난다면 개츠비의 데이지를 갈구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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