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교사를 만나 여러 방면의 성장을 이룬다.
얼마 전, 둘째 딸이 도덕시간에 나온 토론 문제라면서 툭 던졌다.
"유전공학이 발달하여 태어날 아이의 유전적인 특징을 조작할 수 있다면 어떨 것 같아요?"
순간, 정말 오래전에 보았던 잘 만들어진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영화 <가타카>는 유전적 성향으로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미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태어나는 순간 수명, 질병, 성격등을 판별받고 이로 사회적 지위가 부여받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아이를 낳는다.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부적격자인 주인공이 그 역경을 이겨내고 결국 자기 꿈을 이루어낸다는 이야기로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나오는 맞춤형 아기는 신체적 기능 및 인성마저도 완벽할 수 있는지, 부모에게 만족감만 줄 수 있는지 궁금해진다.
이 영화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맞춤형'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아직은 유전공학이 그만큼 발달하지 않아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에서의 '맞춤형'은 마치 그것이 최선이며 최상인 듯 불거져 나온다. 맞춤형 서비스, 맞춤형 복지, 맞춤형 지원을 넘어서서 교육마저도 맞춤형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심지어 내 아이를 위한 맞춤형 교사를 원하는 부모도 늘어나고 있다. 뭐 그 정도 까지냐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 아이가 예민한 편이니 반배정에 신경을 써달라고 하는 말이나 교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민원을 넣거나 전학을 가는 것이 맞춤형 친구, 맞춤형 교사를 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면 맞춤형은 과연 다 좋은가, 심지어 교육에서까지.
서로에게 맞춤형 형태가 아닌 부모와 자식 간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다. 성격이 비슷하면 비슷해서 부딪치고 다르면 달라서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어 끊임없이 조율하게 된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없는 집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식과 부모 간에도 서로의 거리를 조절해야 한다. 각자 넘어서 안 되는 영역을 알면서 서운해하기도 하지만 그를 통해 사람마다 지켜야 하는 거리가 있음을 알고 유지하고자 한다. 아이는 제일 처음으로 사회적 관계를 맺는 부모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상대를 배려하는 법을 알게 된다. 그나마 허물없는 관계이지만 '나' 아닌 사람과의 소통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서로 맞추어가는 과정을 통해 사회성이 길러진다. 아이에게 맞추기만 하면 아이의 사회성을 더디 발달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있어 맞춤형이 되기 어렵고 또 되면 안 된다. 결국 맞춤형이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아이에게 좋은 것이 아니다.
딸 둘을 키우면서 좋은 선생님도 만났지만 그렇지 않은 선생님도 무지 많이 만났다. 직업군이 같아 더 많이 보여 더 많이 감내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맘에 안 드는 선생님에 대해 아이에게는 긍정적인 부분을 말해주면서도 속상한 부분은 혼자 삭혔다. 답답함에 가슴을 쳐야 했지만 아이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다. 근간이 흔들리고 부모와 반하는 일도 생겼지만 아이는 힘들게 자신의 중심을 잡아갔다. 단순히 성향의 문제일 때도 있지만 의무를 다하지 않는 교사를 만나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그래도 그 속에서 아이는 성장했다. 부모로서 불안하고 갑갑하지만 보통 상황에서 키워줄 수 없는 부분들이 자라는 것은 확실했다. 갈등을 겪으면서 고민하고 흔들리면서 중심을 세워가는 아이의 모습에 다양한 교사를 만나는 것은 다양한 환경에 놓이는 것과 같으며 그 속에서 아이의 여러 부분들이 자극을 받고 성장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아이들도 학부모도 피하고 싶어 하는 교사가 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으로 참 열심히 살았다. 다행스럽게 가르치는 일이 재미있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행복하고 보람 있어 열정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아이들이나 부모들은 누가 선생님을 싫어할 수 있냐고 진심으로 말해준다. 정말 고맙다. 그럼에도 안다. 나를 버거워하거나 힘들어하는 아이도 학부모도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만나서 후욱 성장하지 못했던 아이들이 다른 교사를 만났을 때 발달하고 발전하는 것도 보았다. 내가 짚어주지 못했던 부분, 건드려주지 못했던 부분들이 다른 교사를 만나 꽃 피우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많이 놀랐다. 그렇다. 아이들은 여러 교사를 만나면서 여러 부분들이 자극받게 되고 또 성장하게 된다. 아이와 성향이 다르거나 조금 부족하거나 무심해 보이는 교사를 만나도 아이는 자란다. 더 독립적 여질수도 있고 내면을 단단하게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다름을 경험하면서 조절능력을 키우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어떤 교사를 만나든지 내 아이의 어느 부분이 성장할까 궁금해하고 격려하고 믿어주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몇 명이나 만날 수 있을까. 살다 보니 인생에 있어 두 세명의 좋은 친구 또는 선배를 만나는 것도 큰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의 모든 것을 드러내놓고 만나는 사람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 또한 맞춤형이 아니어서 서로 맞추어가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세상에는 나와 맞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 나와 다르다 해서 관계를 끊고 살 수 없으며 배우는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나를 돌아보는 기회로 삼게 된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부모가 아이를 위해 맞춤형 교육이나 맞춤형 교사를 원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가 영글어가는 것을, 다른 사람과 맞추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앗아가는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 존중하면서 조율해 가는 사회화과정이 학교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보다 안전한 곳에서 보다 덜 힘들게. 내 아이에게 맞추라고 하는 것, 민감하고 예민한 내 아이를 배려했으면 하고 조심했으면 하는 것은 되려 아이를 위한 방법이 아니다. 도리어 누가 날 맞추어주길 바라는 것보다 또 누굴 맞추어주기보다 서로 존중하는 관계가 될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갖게 도와주어야 한다.
부모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만나는 모든 교사가 내 아이를 위한 교사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