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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Nov 20. 2023

늙어가는 사람

나이와 지혜로움이 반비례하지는 않아야 한다.

   한번 산 물건은 정말 오래 쓴다. 특별히 환경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물건을 엄청 아끼는 까닭도 아니다. 그냥... 고장 나지 않았고 부서지지 않았는데 버릴 엄두가 나지 않는다. 물론 2년 전 이사하면서 도저히 끌고 수 없는 것들은  처분했다. 오래되기도 하고 여러 번의 이사로 삐걱대는 침대, 7명의 대식구 빨래를 10년 동안 해냈던 15살 세탁기, 냉장고 등 이미 평균이상의 시간과 일을 감당한 전자제품을 처리하였다. 정들었는지 익숙한 건지 괜스레 마음 한쪽이 시렸지만 고장 나면 더 이상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어 버렸다. 역시 가구도 전자제품도 노후되면 겉은 물론 기능마저 떨어진다.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다르다고 믿었다. 나이에 따라 인성도 지혜도 비례하여 성숙해진다고 믿었다. 과일이 익어갈수록 맛있는 것처럼 사람도 성숙해지면서 넓고 깊어진다고 생각했다.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에 '진정한 어른'이 많이 없음에 한탄하면서도 나이와 성품이 비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전자제품이나 가구처럼 기능은 떨어질 수 있지만 인간은 더 지혜로워져야 한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어쩜 그게 쉽지 않기에 억지로 믿고 싶었나 보다.


  신체의 노후화로 인해 하루하루가 다르다. 손톱으로 우연히 긁힌 상처가 잘 낫지 않고 오래가고, 스트레스로 온몸의 근육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친다. 특히 많은 단어들이 혀끝을 맴도는 설단현상에 시달릴 때 몸을 비롯한 뇌의 기능이 날로 뚝뚝 떨어짐을 느낀다. 나이가 비슷한 옆반 선생님과 매번 낱말을 떠올리면서 누구의 뇌가 더 늙었는가를 논하다 웃고 만다. 어느 지방 사람들은 '거시기'로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 역시 '그.. 왜... 있잖아...'로 때울 때가 많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적어도 사람이라면 나이와 현명함이 반비례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압박은 있다. 젊었을 때야 실수해도 귀엽고, 돈을 쓰지 않고 얍쌉하게 굴어도 그냥 넘어가줄 수 있다. 지혜롭지 않아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나이 들면 나아질 거야라는 믿음으로 기다려준다. 요즘 아무리 '미숙함'을 안아주거나 기다려주지 않는 인내심이 적은 사회라 해도 나이가 어리면 허용되는 범위가 넓다. 그런데 나이 먹은 사람이 품성도 갖추지 못하거나 능력마저 없다면 사실 누구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를 먹는 것도, 많은 이가 곁에 있지 않는 것도 두렵지 않지만 누구에게나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늙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늙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신체기능은 나날이 뚝뚝 떨어지는 상황에서 컴퓨터처럼 업그레이드가 가능하지도 않다. 지금보다 더 좋아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우리 집 전자제품이나 가구처럼 버려질 수도 없다.

좋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욕심은 내려놓더라도 어리석고 우둔하여 닫힌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지 않다. 나이에 상관없이 대화를 나누고 끊임없이 배우고 지적인 성장을 멈추지 않고 싶다. 이 또한 욕심일까 하면서도 나이와 지혜가 반비례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마음에 잘 늙자고 다짐한다. 그런 나의 고민에 적중하는 내용을 좋아하는 유시민 작가의 책에서 찾아내고 반가웠다.


인간의 뇌는 어떤 면에서 기계에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잘 관리해도 오래되면 성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보통을 어리석어진다.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데이터라는 세 요소를 종합하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몸의 하드웨어는 20대에 정점을 찍고 서서히 내리막을 걷는다. 뼈, 근육, 관절, 시력, 청력이 다 그렇다. 뇌세포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뇌의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와 달리 더 더 늦게까지 스스로를 개선한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뇌가 획득하는 데이터는 노년기까지 계속 증가할 수 있다.
내 뇌는 매 순간 퇴화하고 있다. 내 자아는 날마다 어리석어지는 중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라도 덜 어리석어지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유시민작가의 <문과 남자의 과학공부> 중


  늙는다는 것은 내게 여유롭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심적인 여유와 시간적인 여유는 생기리라 믿으면서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늙고 싶다. 기억력도 떨어지고 예전처럼 재치 있거나 감이 좋지도 않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에서 나 자신을 기꺼이 포용한다. 기능이 떨어지는 것을 인정한다. 작가의 말대로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덜 똑똑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더 어리석어지고 낡은 기능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는 갖고 잘 늙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한계를 알고 더 나빠질 것을 예상함으로 더 겸손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보리라 마음을 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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