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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Feb 07. 2024

새 학기

걱정과 긴장을 설렘과 기대감으로 바꾸어 갖는다.

  학기말이 되면 또 새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엄청 설레고 떨린다. 어느 학년이 될지 누굴 맡게 될지 궁금하고 또 긴장된다. 교사로서는 학기말에 이루어지는 학년 배정이 큰 이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사실 딸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는 내가 어느 학년을 맡을지는 뒷전이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교육 환경이기에 떨리는 마음에 기도했다. 우리 아이가 일 년을 함께 지낼 친구들과 교사가 그만큼 중요하. 정말 성의도 책임감도 없는 교사를 만나 아이의 근간이  흔들리는 것까지 보았기에 새 학년이 되기 전,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제발 제발 하는 마음과 달리 정말 원하지 않았던 교사의 반에 배정되었을 때는 한숨부터 나왔다. 일 년을 어찌 가야 하나 싶은 생각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나 스스로도 만나고 싶지 않은 교사가 되지는 않아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는 한편 부모입장에서 우리 아이가 새 학기를 맞이하기 전에 필요한 마음을 생각해 본다.

  

  사람 대하는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1학년이 지나고 나면 좋아하는 친구도 생기고 잘 맞지 않는 친구도 있기 마련이다. 상처받은 기억이 있다면 웬만하면 피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다. 내 아이에게 상처를 준 친구를 또 만나면 괴롭힘이 이어지고 상처를 들추게 될까 봐 걱정이 된다. 그래서 저학년 때는 살짝살짝 부탁하는 부모들도 많다. 저학년에는 대처할 힘이 없기에 아이가 움추러들까 봐 정말 안 되겠다고 판단이 되는 경우, 분반에 참고한다. 부모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개념을 떠나서 아이가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럼에도 문제는 다시 생긴다. 싫어하거나 맞지 않는 아이들을 분리한다 해도 그다음 해에는 또 그런 친구가 생기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피해줄 수 있을까?


  학년이 올라가면서 두루두루 섞이는 것은 중요하다. 상처를 준 아이를 다시 만나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다시 만나서 상처받았던 부분을 말함으로써 해소해도 좋고, 상처 준 아이를 대하는 법을 익히는 기회로 삼아도 좋다. 부모가 아이를 지켜보면서 적정선에서 조언을 해주고, 방법을 논의하면서 대처할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중학교에 가면 선택도 부탁도 불가능하다. 반배치 고사를 보기는 하지만 어떤 기준으로 반배정이 이루어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언제 어디서나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인데 초등학교 때부터 관계에 대한 연습이 이루어진다면 어떤 누구를 만나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부모의 짠한 마음에 자꾸 피해 준다면 아이는 대체 언제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을까. 사람을 혹은 상황을 마주하면서 또 부딪히면서 스스로 방법을 찾아내고, 적절한 사이를 유지하는 지혜로움을 갖추게 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배울 것은 있다는 마음을 갖는다.


  사회 공간에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사'라서 어느 정도의 인격을 갖추고 기본이 바로 된 사람들이 모이면 참 좋은데 안타깝게도 '사람'으로서도 '교사'로서도 별로거나 최악인 사람이 존재한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교사일까 하는 사람도 있다. 괜히 내가 부끄러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한다. 어떤 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아이의 일 년이 달라진다. 어떤 교사를 만나도 부모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Win-Win 효과까지 바라지 않아도 교사에 따라 아이의 언행이 달라진다. 특히,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거나 교실이 전쟁터의 느낌을 주었을 때 아이를 학교로 밀어 넣기가 참담하다. 일 년이 정말 길고 고달프다. 아이가 그곳에서 굳건하게 지내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반대로 좋은 교사를 만났을 때, 아이는 무럭무럭 성장한다. 거기에 부모의 지지까지 더해지면 아이는 잘 클 수밖에 없다.


  최악은 아니더라도 별로인 교사를 만나면 모든 것이 부모의 몫이 된다. 생활 습관도, 공부도, 친구관계도 모두 부모가 신경 쓰고 챙기지 않으면 구멍이 생긴다. 보통 교사를 만나는 것보다 몇 배 아니 몇 십배, 몇 백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그 속에서도 아이가 큰다.

  내가 정말 최악이라고 했던 교사와 지내면서 아이는 스스로를 지키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중심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면서 독립적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속에서 아이는 강해졌고 어른스러워졌다. 다른 친구들을 챙기면서 지냈다. 물론 안 만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아이가 잘 성장하리라 믿으면서 지켜봐 주어야 한다. 누굴 만나도 굳은 부모의 심지로 아이를 바라봐주면 아이는  자란다. 그 환경이 아니면 건드려지지 않는 부분이 건드려지고 성장한다.


  아무리 좋은 스승을 만나도 그 스승을 알아보는 눈과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반대의 경우에는 부모의 지지와 노력이 더 필요하다. 즉,  별로라고 생각하는 교사를 만나도 그 속에서 부모는 마음을 열고 우리 아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어떤 점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하며 교사가 아닌 아이를 향한 기대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가 믿는 만큼 잘 클 것이다. 좋은 교사를 만나는 것보다 몇 배의 수고로움과 안타까움, 속상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가 잘 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아이가 배우는 마음을 지닐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적으로만 말한다면 책임감 없고 이기적이며 이상하기까지 한 동료교사들에게 화가 난다. 사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의무감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좋은 교사까지는 아니더라도 보통은 되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 역시 누군가에는 좋은 교사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는 최악의 교사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최악의 교사가 되지 않기 위해 늘 돌아보고 노력하지만 이 또한 만나는 아이들이 그리고 그 뒤의 부모들이 받아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음을 안다. 그래서 교사는 교사대로 노력해야 하지만 아이와 부모 역시 필요한 마음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아이가 졸업하고 나서 정말 별로였던 선생님 이야기는 반드시 짚어주고 가야 한다. 아이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잘못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에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선생님이 이상했다고도 하고 그런 어른도 있으니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고도 했다. 아이가 졸업해야 가능한 과정이지만 그러면서 좋지 않은 교사에 대한 기억, 죄책감 등을 털어내는 기회가 된다.

 

  작은 사회인 학교, 아이는 다양한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잘 지키면서 바른 가치관을 함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든든한 부모 아래서 여러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어보고,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대처방법을 익히는 것은 중요하다. 더 넓고 험하고 더 다양한 세상으로 나가기 전에 말이다. 그럼에도 나 역시 새 학기, 떨린다. 딸들이 좋은 친구와 교사를 만나길 바라면서 말이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좋은 사람을 찾기보다 내가 먼저, 내 딸들이 먼저  좋은 사람, 바른 사람이 되어보자는 다짐을 한다.


  새 학기를 맞이하는 모든 아이들과 부모 그리고 교사들에게 파이팅! 을 외쳐본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는 한 해가 되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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