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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l 03. 2024

상처의 안부를 묻다.

마음에 상처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누군가를 위한 마음

  타고난 성향일까, 자라는 환경의 영향일까. 상처를 받아도 티가 안나는 사람이 있다. 아파도 웃으면서 상처를 차곡차곡 쌓는 사람이 있다. 말을 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다 보니 상대는 그 사람이 상처를 받았는지조차 모른다. 내면이 단단하다고, 쿨하다고 때로는 강하다고 오해받는다. 아니, 평가당한다. 물론, 상처를 덜 받는 사람은 있다. 분명히. 그러나 사람들은 아픔에 대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를 덜 받았다 생각하며 더욱 툭툭 던진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구의 문제일까. 상처를 주는 사람? 아니면 표현하지 않고 누르면서 스스로를 단속하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내는 사람? 잘못을 따질 필요는 없지만 표 내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를 쌓아두고 있을 확률이 높다.  


  여린 것도 타고난 성향이리라. 강해 보이는 쿨해보이는 마스크를 가진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상대가 던지는 말에 아파도 아팠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습관이 되어버린지도 모른다. 자신을 다독이면서 스스로 밴드를 붙여가면서 이겨내 보려는 것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상처가 쌓여갈수록 더욱 견고한 벽을 쌓아 어떤 공격에도 끄떡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벽이 견고해지는 것만큼 마음은 물러진다. 얇아지고 연약해져서 아주 작은 자극에도 무너질 것 같다. 꺼내놓지 못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벽을 더 높게, 견고하게 쌓는다.  


  상처에 대해 누군가는 잊으라 한다. 아이에게도 힘든 일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흘려보내라는 충고도 한다. 이미 단단하고 깊게 뿌리내린 상처의 모습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굵고 긴 상처뿌리가 마음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데 어찌 보낼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그런 아이의 상처를 건든다. 끄집어내라 한다. 가끔은 약간 강압적으로, 가끔은 직선적으로 질문하고 건드린다. 묻지 않으면 건들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의 상황을 시작으로 마음에 있는 상처의 안부를 묻는다. 꺼내길 거부할 때도 있고 한참 그냥 우는 아이도 있다. 소리 지르기도 하고 상관하지 말라는 아이도 있다. 건드리자마자 차오른 고름처럼 툭 터질 때도 있지만 찔끔찔끔 건드려진 구멍사이로 비집고 새어 나올 때도 있다. 인식하지 않았을 때가 나았다고도 하면서 조금은 시원해졌다 한다. 마치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상처가 흘러나오면서 벽이 흐려지고 낮아진다. 그런 경험은 상처나 아픔을 밖에 꺼내놓아도 죽지 않을 수 있음을, 오히려 잠식당하지 않고 곪아서 썩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조금씩 꺼낼 수 있는 용기도 생기게 한다. 


  상처를 건드리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굳이 묻어놓은 것을 끄집어내야 하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차곡차곡 쌓으면서 스스로 그 안에 갇히는 쪽을 선택했던 나는 안다. 상처는 사라지는 것도 잊히는 것도 아님을. 가장 힘들 때, 가장 독하게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그래서 자꾸 끄집어내 주고 상처가 흐를 수 있는 길을 내주어야 함을 안다. 누군가 알아주길, 건드려주길 원하면서도 전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이중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자꾸 끄집어내고 건들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상처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상처를 안에 넣지 않고 밖으로 보임으로 곪지 않고 잘 아물게 하는 힘이 생길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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