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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un 26. 2024

부모를 버려라?

서로 발목잡지 않는 관계가 자유롭다.

  어렸을 때 가난한 가정에서 ‹가족주의›를 강조하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 "콩 한쪽도 나누어먹어라." , "엄마가 죽으면 언니가 엄마고 아빠가 죽으면 오빠가 아빠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 "가족밖에 없다." 등등의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각인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살려고 참 많이도 애썼다. 그 속에서 '나'를 잊었다. '나'를 잃어갔다. 누가 꼭 그러라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가족에 메이게 되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에 반감이 있었으면서도 옳지 않다고 누르면서 그렇게 참 오랜 시간을 보냈다. 부모와 형제에게 상처받으면서도 티 내지 않으려 했다. 상처받는 내가 예민한 거라고, 가족인데 어쩌면 당연히 감내해야 되는 것이라고 다독였다. 나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우리 원가족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 서로 생채기를 내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그러면서 타의 반 자의 반 홀로서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얼마 전에 알았다. 난 어쩌면 누릴 수 있는 자유조차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스스로 저당 잡혔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던 서운함과 서러움의 벽이 무너지면서 그 끈을 들디어 풀었다. 완전히 자유롭지 않지만 적어도 이제는 '나'를 혹은 '지금의 내 가족'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할 수 있게는 되었다. 조금의 찜찜함은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얼마 전에서야 제대로 홀로 서고자 하는 내가 올해 꽂힌 키워드는 당연하게도 '독립'인지도 모른다. 아이의 제대로 된 독립을 이야기하면서도 부모가 자식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필요성을 온몸으로 느낀다. 키워드에 대한 집착이 강지나 작가의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와 마루야마 겐지 작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같은 독립의 필요성을 열렬히 부르짖는 책과 만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가난한 가족일수록 서로의 발목을 쉬이 놓아주지 않음을 알고 있던 나는 홀로서기 위해 부모와의 연을 끊은 아이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렸고 완전한 자유를 위해 홀로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꼬장꼬장한 작가의 말에 공감했다. 영혼이 질식당해 죽지 않기 위한 방법이 부모를 끊어내라는 것은 어쩌면 굉장히 부도덕적이고 반감이 일어나는 말이지만 자식과 부모가 서로에게서 독립해야 함이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독립'을 부르짖으면서도 스스로의 자유를 포기하고 있던 나의 뒤통수를 갈기는 그 손바닥에 경외심을 느꼈다. 아직도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었던 마음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지 벗어난 것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쩜 이미 부모님은 내가 독립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가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한 가족의 딸이면서 엄마인 나는 양쪽의 팽팽한 밧줄에 묶인 채 당기는 쪽의 센 쪽으로 기울어졌고 당겨졌다. 늘 한 걸음 벗어나 상황을 본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다만 서로를 그렇게 구속하고 있음에 익숙해져서 눈이 흐려졌을 뿐이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실을 깨우치지 못했을 뿐이다. 발목이 잡힌 채 나 역시 발목을 잡고 있었다. 버린다는  다는 표현이 과하다면 서로를 놓아준다고 하면 된다. 각자의 자유를 알아서 저당 잡히지 말고 그렇게 한 걸음 물러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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