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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Nov 30. 2022

부모 그리고 자식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의 삶을 살기 바란다.

 

     

  어느 한편에서는 나를 굳이 “충(蟲)”이라는 글자를 붙여 “진지충”이라고 하지만 나를 설겅설겅 보거나 아니면 아예 친한 사람들은 내가 얼마나 “장난충”인지 안다. 친하면 친할수록 나오는 버릇인데 말장난을 비롯하여 몸으로 하는 장난도 서슴지 않는다. 지 버릇 누구 주겠는가. 교실에서도 난 두 가지 면을 다 가지고 있다. 진지하되 지나치게 장난하고 아이들과 신나게 논다.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진짜 즐기면서 논다.  고학년 아이들과는 누가 선생인지 학생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남자아이들에게는 헤드락을 걸고 팔씨름도 하며 여자아이들과는 아이돌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그게 너무 즐겁다. 고학년에 가면 생기가 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평소에 장난을 많이 한다면 내가 진지해질 때는 그들의 마음에 대해, 배경에 대해, 삶에 대해 이야기할 때이다. 특히 사춘기의 아이들과 만날 때는 “부모”라는 주제를 툭하고 던진다. 백 명의 사람이 모이면 백 가지의 사정이 있다고 했던가. 교실에도 각각의 사정이 있다. ‘부모’라는 커다란 배경이 있고 초등학교 때까지는 그 영향을 참으로 많이 받는다. 그런 그들이 부모의 그늘 아래 잘 지내길 바란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부모와 애증의 관계로 들어가는 그들이 엇나가더라도 돌아올 수 있는 여지를 두길 바란다. 그래서 부모에 대한 불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많이 갖으려 한다.   


부모라는 그늘은 언제든 떠날 수도 돌아올 수도 있는 곳이다.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달라졌을까. 가끔 딸이 부모에 대해 불평을 하면 남편은 툭 던진다.

  “너도 부모 선택이 불가했겠지만 우리도 네가 나올지는 몰랐다.”

그러면 딸은 약 올라서 어쩔 줄 모른다.

  “내가 달리기가 빠른 강한 놈이었던 것을 어쩌라구!”

둘은 참 많이 닮았다. 외모도 성격도 말발도. 서로 마치 거울을 보고 싸우는 느낌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아빠를 닮았다고 하면 정색하면서 싫어하는 딸이지만 본인도 안다. 많이 닮은 것을. 어쩌면 딸 말대로 혹은 남편 말대로 부모와 자식은 서로 선택하지는 않았다. 아니 못했다. 유전자의 힘을 느끼면서도 딸은 아빠와 비교하는 것을, 닮았다고 하는 것을 못 견디면서 자기는 자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딸은 그냥 딸이다. 유전자를 물려받았거나 말거나 그냥 독립된 개체일 뿐이다. 그렇게 사춘기를 거의 다 지난 딸들은 계속 부모인 우리 안에서 버둥거린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했던가. 아이들몸이 커지고 마음이 커지면서 자꾸 부모 품이 좁다고 아우성이다. 제각기 갈 길을 떠나고 싶어 한다. 부모의 필요성은 알기도 하고 부모에 대해 애증의 마음을 품으면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아이들을 놓아주는가. 더 끌어안으려고 하지는 않는가. 내 그늘을 벗어나는 아이가 사회라는 뜨겁고 치열한 곳에서 좌절하고 힘들까 봐 불안하여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놓아준다는 것이 완전한 헤어짐을 말하는 것은 아닌데 우리는 뭐가 그리 불안하고 뭐가 그리 안타까운 것일까.

가끔 찾아오는 제자들과 제법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부모 아래 안전함을 만끽하는 아이도 있고, 부모를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불안에 떠는 아이도 있고, 부모와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평온해 보이는 아이도 있다. 어떤 관계이거나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부모와 진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모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아이들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주는 것이 맞았을까. 그들이 굳은 심지로 당당하게 홀로 서길 바랐다. 부모의 그늘이 편안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인간” 자체로서의 자신을 만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부모를 떠나는 것이 완벽한 결별이 아니라 홀로 서서 부모와 동등한 위치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든 찾아가서 쉴 수 있는 곳이 부모 그늘 아래라는 것도 강조한다. 그들이 홀로 선다고 하여 부모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되려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면서 더 진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렇다. 부모도 자식도 서로 떠날 수 있음을 고마워하고 축복해주어야 한다. 언제든 돌아올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면 된다. 돌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만 가지 말라고 당부한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되는 제자들이 찾아오면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늘 강조한다.

  “너는 너의 삶을 살아라!”

그 말에 내포되어 있는 나의 진심을 알까. 성인이 되기 전에 오는 아이들이기에 진심을 담는다. 부모의 선택이 아이의 선택이 되지 않길 바란다. 충분히 이야기하고 의논하고 결정할 수 있지만 부모가 원하는 삶이 아이에게 정말 적합한 삶이라고 덜컥 믿지 않길 바란다. 부모가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진짜 자기는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아이의 삶에서 아이가 중심이길 바란다. 우리는 부모가 되면 최선의 것을 아이에게 주고 싶어 한다. 최고의 삶을 살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아니지 않은가. 내 최선이 내 아이에게 최선이 아닐 수 있지 않은가. 부모는 아이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았고 더 많은 경험을 했기에 지혜로울 수 있고 시야가 넓을 수 있다. 하지만 부모 자신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에서 재단하기에 세상이 너무 많이 바뀌고 있다. 아이가 주도적으로 자기 삶을 끌어나가야 한다. 부모를 점점 더 벗어나야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한다. 아이의 삶은 아이 것이니까. 우리는 놓아주되 믿어주고 지지하면서 바라봐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아이가 부모의 영향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우리 부모님 때문이야!”라는 변명이 먹히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영향이 아이의 인생을 좌우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이 스스로에게 결정적인 것은 맡겨야 하지 않을까. 많은 조언을 늘어놓더라도 최종 결정은 아이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가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갔으면 좋겠다.  누구 때문이야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돌아보고 수정해나가면서 실패도 경험하길 바란다. 그리고 지쳤을 때 부모의 그늘에서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

  나이를 먹어서 오는 제자들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때로는 엄마의 마음으로 때로는 어른의 마음으로 안타깝게 그들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그들을 존중한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응원한다. 나는 부모 편도 교사 편도 아니다. 그냥 그들을 만날 때는 철저하게 그들 편에 선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그들이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아가길 바라기 때문이다. 한 번씩 오는 녀석들은 자리를 파해도 엉덩이를 쉽사리 떼지 못한다. 쉽사리 헤어지지 못한 채 우리는 한참을 서서 그렇게 농담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가기 전에 진하게 안아준다. 나보다 훨씬 큰 녀석들은 몸을 구부정하게 안긴다. 내 귀한 아이들, 그렇게 한참을 안아주면서 다시 한번 말한다.      


 “넌 너의 삶을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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