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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Dec 04. 2022

격렬한 반응과 칭찬

공부의 좋은 성과를 보상물로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자기의 것으로 인지하게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이가 잘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는 것은 부모의 역할이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시험이 끝났을 때,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감사 인사를 챙겨 받았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네가 좋은 것이지 부모인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물론 기뻐해 주고 애썼다는 칭찬은 잊지 않았다. 아이 스스로 뿌듯해하길 바랐고 그런 아이를 보면서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부모 몫임을 알기 바랐다. 대신 시험을 준비하는 공부 태도와 집중하는 정도에 대한 잔소리를 하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아서 엄마는 백점만 좋아하는 것 같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하고 지금도 종종 엄마는 결과에 무심한 척하면서 은근히 잘하기를 강요하고 바라는 것 같다는 두 딸의 투덜거림에 귀가 따갑기도 하다. 사실 평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혼내기보다는 놀린다. 88점을 맞으면 ‘팔팔’을 외치면서 두 팔을 흔들어대거나 ‘사람 몸에는 팔이 두 개이긴 하지.’ 하면서 놀려댔다. C, D라는 평가결과에는 “요즘 애들은 Cd를 안 듣고 MP3 파일로 음악을 듣던데...” 하면서 끊임없이 말장난을 했다. 결국 아이들은 징징대고 남편은 버럭 했다. 그러면 멈추어야 하는데 한번 시작한 장난은 그다음 시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뒤끝 장렬이라는 아이들의 한탄은 한탄일 뿐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공부의 좋은 결과를 보상물로 칭찬해주지 않는 것은 아이와의 약속이자 나의 다짐이다. 보상물이 없으면 안 한다는 것이냐고 타박하면서도 내심 그렇게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공부는 아이 것이다. 

학교에는 작고 큰 평가들이 늘 기다리고 있다. 평가들을 앞둔 아이들은 긴장한다. 시험을 잘 보냐 못 보냐도 중요하겠지만 그 결과에 따라 부모들이 약속한 보상물을 받을 수 있냐 없냐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1학년에서 보는 받아쓰기 점수에도 민감한 경우가 있다. 작게는 간식, 게임시간 약속을 시작으로 크게는 휴대폰, 게임을 위한 현질, 노트북 등을 받기도 한다. 아이들이 자랑삼아 이야기하면 나는 허거걱한다. 그리고 정색하면서 말한다. 

  “공부는 널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야? 근데 잘 보면 왜 선물을 받아?”

이 한마디에 자랑은 쑥 들어가지만 아이가 내 말을 이해하거나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왜 안 그렇겠는가. 공부를 잘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욕구를 위함이 아니고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은데.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한다는 아이가 있기는 할까. 특히 저학년에서는 부모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또는 부모가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지 본인의 욕심에서 공부를 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물론 있다. 아주 간혹 욕심 많은 녀석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도 본다. 그런 경우에도 잘 들여다보면 본인의 삶에 공부가 필요해서기보다는 인정받기 위해, 칭찬받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 같다. 시작을 그렇다 해도 저학년부터 꾸준히 강조하다 보면 고학년에는 공부를 자기 것으로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스스로 욕심을 내서 한다. 작은 습관이 그래서 무섭다. 그런 습관이 삶에 스며들면 아이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한다. 그리고 중ㆍ고등학교 가서도 알아서 열심히 한다. 

공부를 자기 것으로 알고 스스로 공부하는 아이의 경우, 부작용이 있기도 하다. 욕심이 없고 무한 긍정주의자 둘째는 자신이 백점을 원하지 않으니 엄마도 더 욕심내지 말라고 참으로 당당하게 말해서 어이는 없을 때가 있다. 본인의 공부 결과에 자기가 만족한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다. 공부는 너를 위한 것이라고 누누이 말한 것에 대한 작은 부작용이라는 것을 안다. 그냥 공부는 자기를 위해 하는 것이고 자신이 그 결과에 만족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말하는데 요즘 애들 말로 “할많하않”이다. 그래, 지 인생이지 하면서 열받는 마음을 식히려 노력한다. 그래도 작은 부작용이 있는 것이 부모를 위해 공부한다는 것보다 낫다. 부모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별로 좋지 않을 때 공부를 무기 삼아 배짱부릴 여지를 주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공부하라고 매달리지 않아도 되어 좋다. 공부가 본인이 내세울 수 있는 무기가 되어야지 부모 말에 반항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땀이 묻어있는 노력을 보상물로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초등학교에서는 벼락치기가 통한다면 중고등학교에서는 사실 그렇지 않다. 대충 수행평가 30%+중가평가 30%+기말평가 40% 이거나 수행 20%+중간 40%+기말 40%으로 최종 결과가 나와서 하나만 삐끗해도 정말 좋은 결과를 받기 어렵다. 그냥 보기에는 좋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면 아이들의 삶이 퍽퍽하게 느껴진다. 닭가슴살처럼 단백질은 많으나 목이 멘다.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은 좋으나 숨 쉴 틈이 없어 보여 안타깝고 짠하다. 하여튼 어느 순간부터인지 아이가 가져오는 결과는 아이의 시간이었고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적에는 아이가 들인 노력과 고생, 수많은 독서와 순간순간의 결과물들이 녹아들어 있었다. 잠깐 한눈팔면 놓칠 수밖에 없는 귀한 결과였다. 한순간에 뚝딱 얻어낼 수 없는 결과를 어떤 보상물로 보상이 가능할까. 고등학생이 되니 사실 노력과 좋은 성적이 비례하지 않았다. 실수를 줄이지 않으면 평균이 90 넘어도 1등급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도 하고 분노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성실하게 하나하나 해가는 모습은 칭찬해주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어떻게 물건으로 돈으로 보상이 될 수 있을까. 아이는 원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보상물로 공부의 결과를 셈하기에는 아이의 노력을 폄하한다는 생각이 든다. ‘폄하’라는 단어 선택에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어 단어의 뜻을 정확히 짚어본다.     


*폄하 : 가치나 수준을 깍아내려 평가함.    

   

이런 나의 말을 들으면 우리 딸을 폄하해도 좋으니 용돈을 올려달라고 할지 모르지만 난 아이의 노력을 깎아내릴 수 없다. 애써 쌓아 올린 탑이다. 그 자체에 경탄해야 하고 그 아름다움에 경이로움을 표현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언제인가는 스스로 만족해할 것이다. 스스로 만든 공든 탑의 아름다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내면의 보물이 된다는 것을 믿을 것이다.     

 

  아이의 노고를 인정해주고 격렬하게 칭찬해주면 좋다. 

아이가 한 때 친구들이 받는 보상물을 부러워했다. 결과에 따라 금액대가 다른 보상물에 대한 욕심을 냈고 노골적으로 요구도 했다. 흔들릴 때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사주고 싶었고 무지 칭찬해주고 싶었으나 순간순간을 독하게 이겨냈다. 대신 우리 서로 노력하고, 신경 쓰고, 애썼으니 맛난 것을 먹자고 하였다. 먹는 것으로 퉁치기보다는 서로 격려를 위해 힘을 내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먹자고 했다. 뭐, 보상물 대신 뱃살이 두둑해지기는 하지만 그만큼 마음도 두둑해진다. 

아이가 먹는 것으로 격려를 충분하게 생각하지 않을 나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뻔뻔함을 장착한 딸이 더 많이 자랑스러워해 주기를 바랐다. 그 정도야 뭐... 내 성격에 맞지 않음에도 아이 앞에서 가족들에게 전화하여 큰 소리로 자랑했다. 톡으로도 상장을 찍어서 알리거나 좋은 성적의 과목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정말 열심히 알렸다. 엄마 혼자 자랑스러워하고 기특해하는 것이 부족하다면 온 가족에게 동네방네 소문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이가 흡족할 때까지 알렸다. 딸은 아빠에게도 요구했다. 그러면 아빠는 더 과장되게 격렬하게 반응해주었다. 물론 먼저 "잘했네" 했는데 만족스러워하지 못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조금 부끄럽게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활짝 열고 “00 여고 000 모의고사 0과목 1등급이다!!”라고 소리쳤다. 나만 부끄러운가. 아이는 말리는 것 같았지만 그 입은 귀에 걸렸다. 그 정도쯤이야 해줄 수 있다. 스스로 뿌듯해하면서도 부모의 인정을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반응을 해주거나 어떤 칭찬을 해주거나 아이가 그만하라고 말릴 정도로, 아이가 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그다음에도 노력할 힘을 얻게 해주어야 한다. 물론 그 속에는 진심이 담겨야 한다. 아이는 귀신같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기 때문이다. 칭찬에 반응에 인색해지지 않아야 한다.      


  아이가 쌓아가는 시간과 노력의 결과를 보상물로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사실 조금 강한 표현이다. 그렇게까지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부모가, 교사가 우리 아이에게 외적인 보상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크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내적인 동기가 생겨야 우리 아이는 계속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성과에 만족해야 지속적인 힘을 얻어 나아간다. 아이가 공부는 자기 것임을 인식하고 열정을 갖고 성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들어낸 성과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좋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어른은 격렬하고 열렬하고 따뜻한 반응을 준비하면 된다.

사실 살다 보면 자신의 노력에 알맞은 보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의 노력과 열심에 비례하는 결과를 얻는 것 또한 복이고 운이라는 생각도 한다. 노력에 맞는 보상물을 받지 못했다 해도 좌절하기보다 한번 더 생각해보고 조율하면서 나아갈 힘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좋은 결과물이나 성과는 보너스로 생각하되 노력하는 과정에서 쌓이는 내공과 무엇이나 도전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상으로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결과에 굴복하지 않는 의지 또한 생기리라 믿는다. 어쩜 그게 진짜 보상 일지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실력과 능력 그리고 일이나 공부를 대하는 태도는 늘 들이는 노력과 시간을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알아가면 좋겠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때 얻는 진짜 보상은 그 아이 안에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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