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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Dec 06. 2022

침묵 그리고 포옹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진한 포옹이 위로가 된다.

  우리 집에는 “멍멍이”와 “야옹이”가 산다. 애완동물이 아니고 조금 둔하고 우직하고 잔꾀가 없는 큰 아이를 멍멍이로, 애교 많고 잔머리 잘 굴리고 편하게 살고 싶은 데로 사는 둘째를 야옹이로 부른다. 아빠가 불러주는 애칭인데 그만큼 둘은 정말 다르고 만나면 으르렁거린다. 그 와중에 닮은 것이 있다. 둘 다 안기고 부비적거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산 만한 것들이 아직도 안아달라고 하고 부비적거린다. 아빠와 거리를 둘만도 한데 내가 안아주지 않음 할 수 없이 아빠한테 안긴다. 귀차니즘에 늘 시달리는 나는 하루에 안는 횟수를 정해놓는다. 우리 가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우리 딸들이 어렸을 때 많이 안아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지금이라도 안아주라 한다. 모르면 말을 말지. 어찌 더 안아줄 수 있을까. 기회만 있으면 만져달라고 하고 안아달라고 하고 나는 닳아 없어질 지경이다. 엄마, 아빠한테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를 봐도 우선 안는 것으로 인사를 하는 딸들에게 포옹은 인사다. 그들에게 포옹은 그냥 일상적인 것으로 마음과 정을 나누는 것이다.      


  사실 딸들이 저러는 것은 내 영향일지 모른다. 나는 저학년과 고학년에 상관없이 집에 가기 전에 서로를 꼬옥 안아주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학교에서의 하루, 좋은 일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정하기 어렵지만 본의 아니게 아니 본능적으로 엄청난 잔소리를 해댔을 것이고,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성격상 당연히 눈물이 쏙 빠지게 혼냈을 것이다. 물론 칭찬도 받았을 것이고 재미있는 일도 있었겠지만 그런 것보다 마음에 남는 것은 억울하고 짜증 나는 일 아닐까. 그래서 집 가기 전에 마음의 앙금을 풀고자 안아주는 것이다. 

고학년이 되면 남자아이들은 당연히 사춘기라 손을 잡는 것부터 거부한다. 그런 거부감을 물리치고 하교 인사로 안는 것을 감행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고 도망가기도 한다. “선생님, 사랑합니다.”라고 하트 만드는 것도 못 견디어한다.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교사의 권위 아니겠는가. 한 달만 인상 쓰는 놈들을 참아주면 된다. 사실 그들이 날 참아주는 것이겠지만 알면서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간다. 한 달이 지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안기고 한숨 쉬며 억지 사랑고백(?)도 한다. 아무리 인상을 쓴 날도, 서로 따지면서 싸운 날도, 삐친 날도, 서운한 날도 집에 가기 전에 치루어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인사를 안 하고는 집에 못 가고, 슬쩍 내뺐다가는 그다음 날 하루 종일 뒤끝 부리는 나를 이겨내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가끔은 학원에 지치거나 부모와의 갈등에 지친 녀석들은 그냥 한없이 안겨있다 가기도 한다. 그럴 때는 정말 아무 말 없이 안고 등을 두드려준다. 짠하다.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을 때도 많다. 그냥 손을 잡고 눈만 바라보기도 한다. 진한 마음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상황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림짐작하여 그들을 위로하기에 어떤 말도 닿을 수 없음을 알기에 그냥 안는다. 하염없이 안겨만 있다가 가는 녀석도 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녀석도 있다. 집에 있는 두 딸과 또 다르게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내 자식들이다. 마음은 손을 타고 토닥거림을 통해 전해진다. 백 마디 말보다 더 진한 여운을 남기면서. 그래서인지 나이에 상관없이 나를 아는 녀석들은, 겪어본 녀석들은 인사로 안는 것을 어색해하지 않는다. 

     

  졸업하고 오는 녀석들도 나를 발견하자마자 쪼르르 달려와서 안기거나 안아준다. 남자아이들은 훌쩍 커서 자기보다 작아진 나를 슬쩍 비웃으면서(그래서 10cm 통굽 슬리퍼를 포기하지 못한다.) 놀리면서 안긴다. 큰 댕댕이들 같다. 우리는 헤어질 때도 그렇게 헤어진다. 끽해야 한 학기에 한번 만나기에 할 이야기가 쌓여 한두 시간 안에 다 풀어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그렇게 달래고 간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야기보따리를 끄집어내지만 반도 못하고 가는 느낌이다. 나 역시 아쉽기만 하다. 각자의 길을 가는 그들이 당당하게 나아가길 응원한다. 좋은 대학을 가서 혹은 성공하면 온다는 녀석들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또 안아준다. 좋은 일로 오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 와도 괜찮다고 말한다. 실패할 때, 힘들 때 오면 아무 말 없이 선생님이 안아주겠다고 약속한다. 잘하고 있는 모습이 기특하고 자랑스럽겠지만 그보다 존재 자체가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런 진심을 포옹을 통해 툭 건넨다. 엄마의 마음으로 그리고 어른의 마음으로 그들의 겪는 아픔과 고통을 안아주고 덜어주고 싶다. 그렇게 우리는 정을 쌓아가고 서로를 위로한다. 사실 그들만 위로받는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들의 마음을 느끼기에 위안을 받는다. 

      

  학교에서는 점점 성에 대한 민감성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말 필요하고 중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때로는 이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자주 하던 "똥집" 장난은 당연히 성폭력으로 치부되고 어깨를 두드리면서 격려하는 것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면 성추행이라 가르치라 한다. 그렇다면 하교 인사 대신 안아주는 것은? 성교육을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덧붙인다. 선생님은 너희보다 큰 자식을 키우는 엄마로서 안아주고 도닥거리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선생님 손길이 싫으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주면 좋겠다고 한다. 그러면 더 이상 신체적인 터치를 전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불편하다. 물론 나쁜 인간들이 많아 포옹과 토닥거림의 순수함이 왜곡되는 것이겠지만 저학년 때부터 이루어지는 이런 교육은 성의식을 바르게 잡아주기보다 성에 대해 더 예민하게 만드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남자 아이거나 여자 아이거나 함부로 손도 잡지 말라는 교사도 있다. 안아주는 것도 더 이상은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교사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위험한 행동일 수 있는데 왜 그러냐는 비난의 시선으로 나를 본다. 아이들을 자연스럽게 안아주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교사도 있고 아이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너무 마음대로 하는 것 아니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맞을 수 있지만 나는 아직도 말로 그들을 위로하는 법도, 내 마음을 온전히 전하는 방법도 모르겠다. 말이 닿지 않고 그대로 땅바닥에 버려지고 허공으로 날아가버려 진심이 전해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가끔은 생각한다. 외국 것, 특히 서양문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포옹이나 악수는 왜 배우지 못하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토닥거림이 마음으로 전해지는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경험하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내가 시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Free Hug"를 해주는 봉사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 아이들, 마음껏 안아주어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하면 안 되는 것일까. 지친 마음을, 상처받은 마음을 안아주고 싶다. 잘하고 있는 것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토닥여주고 싶다.   


  성에 관련하여 민감성, 중요하다. 나 먼저 키워야 하고 아이들 역시 키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알려주고 싶다. 그냥 인간으로서의 온기를 나누는 방법 중 하나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성에 대한 민감성만 강조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너무 쉽게 모든 말과 행위를 “폭력”과 연결한다. 약간의 말장난에도, 몸 장난에도 “폭력”을 운운하고 어깨에 손만 얹어도 “성추행” 또는 “성폭력”이라는 단어로 질색하며 물러난다. 정으로 다가가는 모든 행동들을 그렇게 치부할 때면 정신이 없다. 당연히 정말 당연하게 싫으면 하지 않아야 하고 불쾌하면 당당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요구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작은 토닥거림과 쓰담 거림도 있음을 우리 아이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서 아직도 난 아이들을 안아준다. 물론 싫다고 하는 아이는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아이들이 많다. 고맙다. 어느 날, 어떤 아이는 속상해 보이는 나를 사뿐히 안아주었다. 그냥 안아드리고 싶었다고 해서 고마웠다. 어떤 아이는 치과 간다는 내 손을 다정하게 잡아주면서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이들의 그 따뜻함에 가끔은 울컥할 때가 많다. 그렇게 정을 나누어주는 아이들이 고맙다. 어떤 위로와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절대로 아이들을 안아주면 안 되는 시기가 오겠지 싶다. 더 엄해지고 예민해지는 그 시기가 오면 나 역시 아이들을 안아주는 것을 그만해야겠지만 그전에 마음을 온전히 전할 방법을 찾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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