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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Dec 26. 2022

어제보다 나은 오늘

변화를 위한 씨앗은 뿌려졌으니 믿고 지켜봐야 한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다!”      


  많은 사람들, 그중에서 특히 나는 사람이 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질적인 부분도 많지만 자랄 때의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생각에 과연 누가 그것에서 벗어나 변화된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것이다. 물론 살면서 큰일을 겪으면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가짐이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떤 상황에 맞닥트리면 그렇지 않은 모습을 본다. 그냥 나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근본이 바뀌지 않는데 어찌 바뀔 수 있을까. 나의 예민한 기질이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나이를 먹어도 끊임없이 장난이 솟구치는 이 마음을, 생긴 것은 차갑고 독하게 생겨서 길거리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부탁도 거절하지 못하는 유약함을, 대답은 잘해도 결국 뜻대로 해버리는 똥고집을 도무지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변한다는 것은 어렵다. 내가 변하지 못하면서 다른 누구의 변화를 어찌 바라고 믿을 수 있겠는가.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그릇을 지금 변형시킨다면 와장창 깨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도 있다.


  교사 입장에서 교육하면서 가장 위험한 생각 중 하나가 《변화》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아이를 일 년간 만나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오만도, 반대로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아이를 바꿀 수 없는 절망도 위험하다. 나는 젊었을 때는 전자 쪽이었고, 경험이 쌓이면서는 후자 쪽이었다. 늘 양극단으로 달리는 성격은 변화에 대해서도 희망과 좌절을 오가게 한다.

젊었을 때 나는 교육에 대한 노력과 열정이 아이를 당연히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더 나아가 바꾸었다고 믿었다. 아이는 내 앞에서 분명히 변한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아이에게 나는 마음과 정성과 시간을 쏟았다.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아직 아이니까 변하리라는 희망으로 일 년을 함께 했고 실제로 아이도 그런 나의 희망에 부응해주는 듯했다. 그러나 학년을 올라가고 가끔 마주치는 그 아이를 보면 변화가 아니라 일시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한 교사 아래서 지혜롭게 살기 위한 위장이라는 생각도 들어서 배신감도 느꼈다. 이런 경험은 쌓이고 쌓였다. 처음에는 나의 무엇이 부족하여 아이를 변하게 하지 않았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절망하고 좌절했다. 한낱 교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고. 겨우 일 년 가지고 뭘 바란 것일까 하는 한심한 마음으로 스스로 많이도 비웃었다. 상처였던 것 같다. 아무리 애써도 되지 않음에 대한 상처이자 교사의 역할에 대한 의심이었다. 무엇을 더 해야 할까. 그냥 가르치는 것만 잘해야 할까. 아니면 아이 자체의 변화가 아니라 단순히 일 년 동안의 학교생활만 봐야 하는 것이었을까. 오만은 꺾인 가지처럼 힘없이 늘어지고 썩어서 떨어져 버렸다. 그리고 깊은 좌절에 떨구었다. 교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변화는 무슨.. 일 년 동안 사고 안 나면 만족해야지. 가르치기만 잘하면 되는 거지, 뭘 인성까지 기르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바라.’

역시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다는 교사 같지도 않은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누군가 그런 나에게 말해주었다. 아주 조금은 아이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고 아주 조금은 아이 성장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지금 획기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씨앗은 뿌려졌고 마음에 약간의 움직임이 있었기에 아무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 변화의 씨앗은 뿌려졌으니 믿고 바라보면 되는 것이었다. 그 씨앗이 언제 싹을 틔우고 자랄지 모른다. 하지만 자랄 것을 믿고 지켜봐 주면 아이는 성장할 것이고 미묘하게 변해갈 것이다. 수많은 어른들의 말이 언젠가 아! 하고 득도하듯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만났을 때 순간 성장하고 순간 변화하길 바란 난 지극히 오만했고 지독히 무지했음을 알게 되었다. 변하지 않은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내 시선이었다.


영화 <킹스맨>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인간이 우수하다고 해서 고귀한 것은 아니다. 남들과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과거의 자신과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 변화,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 사람이 꽃보다 예쁠 때는 이때뿐이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삶의 의미고, 고통의 반대가 행복이 아니라 권태인 이유다.
  -중략-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자기가 변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 이런 인간일수록 쉽게 변한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변하는가이다. 권력인가 아름다움인가. 지혜로운 사람들은 후자를 추구한다. 권력은 타인의 시선이고 아름다움은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이다.
 -정희진 작가의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에서 발췌.

 

  나는 다른가.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는가. 그런 마음이 있는가. 아이가 변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나의 시선과 나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임을 이제야 깨닫는다. 하루가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져가는 우리 아이를 봐주지 못한 것은 나의 변화가,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나아가고 있는데 내 눈이 감겨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변하지 않았을 뿐이다.'라는 문장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아... 부끄럽다. 쥐구멍에 숨고 싶다.


  내가 만나는 아이는 꽃보다 늘 아름답다. 쉽게 동화되고 쉽게 깨우치며 보다 예쁜 마음으로 변화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아직은 권력을 위해 즉 타인의 시선 때문에 변화를 추구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이 또한 습관이 되면 결국 아름다움 즉 자기 충족을 위해 변하려고 노력할 것을 믿어본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아이는 정말 어제보다 오늘 더 나아졌으며 내일 더 나아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이 덕분에 나는 나를 돌아본다. 내가 변한다면 그것은 아이의 시선 덕분일 것이며 아이들 앞에 아름답게 서고 싶은 자기 충족적 마음 덕분일 것이다.

아이의 변화와 성장을 원하는가. 그럼 우선 개안하고 아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그들의 변화를 인정해주면서 가야 한다. 습관을 고치는 것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고 고치고자 하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어야 하며,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그들을 보아야 한다. 그들이 변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면 나를 먼저 돌아봐야 함을 잊지 않아야겠다. 나는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기에 그 눈마저 가리어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한 번에 훅 좋아지는 것은 다시 한번에 원래 습관대로 돌아갈지 모른다. 그러나 조금씩 나아지는 것은 되려 생활에, 몸에 스며들면서 가기 때문에 진정한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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