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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Jan 02. 2023

이별 준비

서로 잘 보내줌으로써 마음에 여운만 남긴다.

  사춘기를 오래 앓았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어려서부터 난 참 나를 좋아하지 않았었다. 없는 살림에 셋째를 임신하고 고민한 엄마에게 할머니는 아들은 두 명은 있어야 한다고 어떤 근자감에서였는지 셋째가 아들 같으니 낳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낳은 아이가 불행히도(?) 딸이었다. 나는 아들로 태어나지 못했다는 알지 못하는 죄로 인해 할머니에게 구박을 받았다. 물론 엄마의 비호가 있기는 했지만 많은 식구 살림에 엄마의 삶은 늘 고달팠고 은연중에 난 눈치만 많아졌다. 학교 가서는 언니와 비교하는 선생님들로부터 주눅이 들었다. 오빠는 아들이라 언제나 대접받았다면 학교에서 고루 잘하는 모범생 언니는 외모와 솜씨로 인정받았고 약간은 자유롭고 어딘가 반항적인 나는 늘 비교당하기 일쑤였다. 물론 학교 밖 어른들에게도. (그래서 나는 교사가 되고 나서 학교에서 절대로 형제를 비교하지 않는다. 무조건 우리 반인 아이 편을 들었고 형제자매 이야기는 아이가 하지 않으면 절대 먼저 꺼내거나 아이를 비교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나의 사춘기는 길었고 그 끝에는 항상 ‘죽음’이 있었다. 죽음이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음 곁을 맴돌았던 것 같다. 죽는 것이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삶을 끝내는 하나의 방식으로, 회피할 구멍으로 여겼다. 살아있는 것이 슬펐고 부끄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난 그때부터 매일 나와의 이별을 준비했던 것 같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10대 때는 아름다운 나이 20살에 죽으리라 막연히 생각했고 20대 때는 30살이 되면 죽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정말 막연하게 그때 되면 다 방법이 있으리라 믿었고 죽음이 날 문 앞에서 기다려준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가 죽으면~”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미리 유언도 하고 유서 비슷한 것도 써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나서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습관이 어디 가겠는가. 결혼하고서는 남편에게 “내가 죽으면~” 툭하고 던지고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고 나서는 “엄마가 죽으면~ ”을 심심하면 꺼냈다. 좋은 의도는 절대 아니었지만 남편도 아이들도 죽음이 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다. 그 말만 들어도 눈물을 글썽였던 딸들은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잘 받아친다. “알았어요. 엄마 죽으면 우리 슬퍼하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게요.” 하거나 “엄마, 죽는 것에는 순서 없대요. 또 알아요. 내가 먼저 죽을지.”라고 말해 매를 벌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제 죽음에 대해 쉬이 말하면서도 그 묵직함을 느끼기도 한다. 장난처럼 말하는 그 말들을 제외하고도 우리는 식탁에서 죽음에 대해 틈틈이 이야기를 나눈다. 장기기증에 대해서도 서로 부탁하기도 하고 장례식에 대해 반대되는 의견을 말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장례식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딸은 그것은 산자를 위한 위로의 과정이니 엄마의 유언대로 할 수 없다고 한다. 우리는 죽음을 삶의 다른 얼굴이자 평소 우리가 마주하는 이별 중 가장 큰 이별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모든 이별하는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어떤 이별이거나 상대를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 잘 보내주어야 한다. 그냥 보내주기보다 보내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중요하다. 이별하는 많은 순간들을 직면하면서 그 과정을 잘 보낼 수 있게 도와준다면 이별을 꼭 슬픈 단절로만 남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학교에 있다 보면 아이들과 매해 짧은 이별을 한다. 그리고 졸업하는 아이들과는 만남을 기약하지 못하고 긴 이별을 한다. 매해 겪는 이별이기에 나는 더욱더 민감하고 더욱더 잘 보내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잘 보내준다는 것은 마음에 혹시 남았을 상처를 떨쳐내고 여운만 남기는 과정이라 믿는다. 그래서 헤어지기 전에 아이들에게 당부한다. 


  “혹시 선생님 말에 마음 상하거나 상처받은 적이 있다면 정말 미안해. 용서해 주렴. 너희를 아프게 할 의도보다는 너희가 좀 더 잘 성장하길 바라는 욕심의 말이었겠지만 너희에게 아픔으로 남지 않기 바라. 너희가 나중에 선생님을 미워해도 괜찮지만 선생님의 말로 인해 상처받아서 너희 스스로를 미워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해.”


헤어지기 한 달 전부터 진심을 담는다. 나를 미워하는 것은 괜찮지만 정말이지 나의 말로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기에 온 힘을 다해 본다. 그리고 꼭 안아준다. 내 마음이 닿기를 바라면서. 이별에는 만남보다 더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만남은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고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지만 이별은 더 이상 서로를 보듬어줄 기회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거나를 떠나 한 공간에서 생활했던 관계이기에 더욱더 이별에 공을 들인다. 그래서 12월부터 아이들에게도 이별을 꺼낸다. 마치 우리 딸들에게 지금부터 나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조금 이르게 헤어짐에 대해 꺼내든다. 서로가 서로에게 잘할 기회를 주고 조금 가까이 다가온 이별을 대비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길 바라면서 말이다. 사실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생님과 헤어져도 아는 척해달라, 안아달라 하면서 그동안 미안한 부분도 은근히 계속 사과하는 시간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매번 이별을 미리미리 준비하고 있다. 아이들을 보낼 준비를 진지하게 그리고 가볍게 한다.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의 준비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 안다, 이별이 결코 완전히  헤어지는 것이 아님을, 서로에 대한 마음이 있다면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음을.


  언제부터인가. 이별 그리고 죽음이 나에게 무겁지 않다. 죽음을 내가 알고 겪은 이별 중 가장 큰 이별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굉장히 이기적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죽음을 하나의 이별로 생각할 뿐, 내 주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예전에 비해 나아지고 있지만 솔직히 내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떠올리기만 할 뿐 더 나아가는 생각과 감정은 보류해두고 있다. 이제는 내가 먼저 떠나보낼 사람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고 마음먹는다. 이별에는 과정이 필요하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하니까 말이다. 슬프지만 유쾌하게 따뜻하게 이별하고 싶은 것은 나의 욕심일지 모르지만 그들을 떠나보내면서 나의 일부를 같이 보내면 괜찮지 않을까. 그 사람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한 나의 마음도 같이 보내주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 비록 실체는 없어도 마음 한쪽 구석에 진하게 담아놓고 미소 지으면서 떠올릴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내가 먼저 떠나게 되어도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예전 졸업생들과 헤어짐을 이야기하면서 그랬다. 선생님이 죽었을 때 너희가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지 궁금하지만 울면서 떠올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한 아이가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면서 선생님을 기억하고 싶다고 해서 흔쾌히 그러라 했다. 굳이 이별의 모습을 슬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만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 


  새해가 왔다. 직업의 특성상 새로운 만남 전에 늘 헤어짐이 존재한다. 그래서 1월이지만 난 이별에 대해 떠올린다. 2월이 오면 아이들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동안 준비했고 지나왔던 과정으로 인해 많이 슬프지만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보내는 사람의 입장으로 아이들보다 더 많이 마음을 다지고 있다. 일 년이 긴 시간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 년 동안 그들은 “내 새끼들”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둥지에서 키운 아기 새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에 애달프지만 한편으로는 믿는 마음도 있다. 그들의 힘찬 날갯짓을 믿어보고 어디 가서나 잘 지내리라 믿어본다. 어쩜 이 믿음을 갖기 위해 나는 남들보다 이르게 떠나보내는 준비를 하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여운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진한 여운을 남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잘 보내주고 싶다. 그리고 그들도 이런 기회를 통해 다른 사람을 잘 떠나보내는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어떤 이별이거나 서로를 잘 보내주는 과정을 걸친다면 이별이 슬프기보다 아름다운 것으로, 애잔한 것으로 남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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