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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Feb 27. 2023

너는, 너.

뭔가를 꼭 해내야 하고 이루어야 하는 걸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첫째와 중학교 3학년이 되는 둘째를 보면서 엄마로서 마음이 급하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알기에 더 그렇다. 휘리릭 가버리는 시간을 아이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나는 아이들보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23년도 벌써 두 달이 다 가버렸네 하면서 몸도 하루하루가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 아이들은 하루만 잘 보내면 되는 것 같아 보인다. 세상이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촘촘하게 계획을 짜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하루를 잘 보내고자 하는 아이들을 보면 속이 터진다. 조급증이 생겨버린다.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데 하면서도 학원도 인강도 강요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맡겨두고 있다. 강압적으로 시키는 것은 “글쓰기활동”과 “함께 읽기”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면 딸들은 분명 뭐라 할 것이다. 영어단어도 외우라 하고 문법도 공부하라면서 확인하는 엄마가 두 가지밖에 강압적이지 않다고 하냐고 두 눈을 치켜뜨겠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학원에 보내지는 않느냐며 변명한다. 그리고 엄마도 힘들지만 너희들이 공부해 놓은 부분을 확인해 준다며 그럼 하지 말라고 튕겨보기도 한다. 사실 잘 모르겠다. 수학학원을 다녀서 등급을 확 올리는 첫째에게 국어, 영어학원도 다니게 하여 성적을 올리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은 아닌지 고민한다. 어떤 점수에도 긍정적인 둘째를 억지로라도 더 열심히 하게 해야 하는 것이 엄마의 역할인가 싶기도 하다. 헷갈린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몸이 피곤했지만 상대적으로 고민은 적었다. 책 많이 읽게 하고 기본을 다져주면 되었는데 이제는 정말 입시를 남 몰라라 할 수는 없는 나이여서 어렵다. 특별히 뭘 더 해주지 않지만 마음만 뒤숭숭하다. 


  공부의 목적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고 입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무엇을 목표로 삼고 계획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나의 삶은 어떠한가. 인생에 있어 성공했는가? (성공의 기준도 모르겠다.) 교사로서 교육에 한 획은 그었는가? 무엇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느끼는가? 삶에 있어 후회하지 않는가? 

아~~~~~~~~ 모르겠다. 진짜 모르겠다. 생각해보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삶이고 뭔가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없는 삶일 수도 있다. 그냥 한 해 한 해, 아이들을 만나고 서로 배움을 주고받으면서 소소하게 행복을 느낀다.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교육자도 아니요, 어떤 한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 것도 아니며 나만의 교육방법을 연수하러 다닐 만큼 특출 난 것도 없다. 누구가 나에게 이루어낸 것이 있냐고 묻거나 해낸 것에 대해 말해보라고 하면 “글쎄……”하면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대답을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교실에서 아이와 만나고 소통하고 배움을 주고받는 것을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뭘 해내지 못해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안 되는 것일까. 솔직히 좀 더 젊었을 때는 교육 쪽에서 이름을 날리고 싶었던 욕심이 없지는 않았다.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나의 한계를 알기에 작은 발걸음이 더 소중해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라는 아이에게도 뭘 꼭 이루려고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어제 토론을 한 고정순작가의 <나는, 비둘기>라는 그림책이 떠오른다. 인간에 의해 날개가 다치고 한쪽다리마저 잃은 비둘기는 끝까지 날고 싶어 한다. 제목부터 마음에 걸린다. 하늘을 나는 비둘기일까, 아니면 그냥 “나는, 비둘기”라 소개하는 걸까. 날고 싶어 하는 마음을 끝끝내 버리지 못하는 비둘기는 우연히 목에 걸린 검은 봉지를 날개로 생각하고 한 발로 뛰는 연습을 하고 결국 난다. 어른의 입장으로 날고 싶은 마음을 포기하지 않는 비둘기를 격려하면서 희망적인 말로 응원했어야 할까. 근데 비둘기는 날지 못하면 비둘기라 할 수 없는가. 왜 나는 그렇게 날고 싶어 하는 비둘기에게 날지 못해도 괜찮다고,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너”라고 외치고 싶었을까. 희망을 이야기해 주기보다 어떤 모습이거나 “너” 일 수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냥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걷고 나 아가다 보면 너의 정체성을 찾고 너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날고 싶어 하는 비둘기에게 그 역시 또 다른 모습의 강압일 수 있겠다. 아마 그 비둘기를 보면서 나는 나를 보고 또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보았나 보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아이들에게 “꿈”을 이야기하기보다 “목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중학교 때 진로를 정하고 그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꿈”과 “목표”는 다른데 나는 아이들의 꿈을 빼앗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입시에 이어 직업에 대해 불안했던 나는 아이들에게 자꾸 뭔가를 해내라고, 성과를 내야 한다고, 세운 목표를 달성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그래야 진정 행복해질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야 비로소 당당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나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가 보여주는 결과에 눈이 멀었었다. 


  드디어 현실엄마/교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난 그냥 현실에 눈이 멀어서 아이를 존재 자체로 인정하지 못했다. 꿈을 꾸는 아이에게 현실을 직시하라면서 오히려 세상을 보는 그 눈을 가렸다. 뭔가를 하지 않아도 너는 “너”인데 말이다. 그 자체로 아름답고 빛나는데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평범하다. 평이하다.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떠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보자마자 폭풍 같은 수다를 펼치는 두 딸이 있어 소소하게 행복하다. 교실에서 나를 좋아해 주고 마음을 나누어주는 아이들, 함께 걸어주는 부모님들이 있어 힘을 얻고 매년 조금씩 성장한다. 뭔가를 해냈다고 말할 수 없지만 하루가 따뜻하고 일 년이 꽉 채워진다. 나는 그곳에서 최선을 다한다. 열정을 쏟는다. 그렇다. 어떤 모습이거나 상관없이, 성과가 있든 없든 나는 나로서 행복하며  행복할 수 있다. 그리고 너는 너인 것이다. 결과는 몰라도 괜찮다. 그렇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작은 것에 감사함과 행복을 느끼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 아닐까. 날고 싶어 하는 비둘기를 꺽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날거나 날지 못하거나 너는 너라는 것에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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