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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Apr 24. 2023

부모와 교사의 역할

선생님은 학교에서 만나는 것으로 족하다.

  한 직업을 오래 하다 보면 직업병이 생긴다. 얼마나 소담 마켓에서 뵌 도자기 관련 작가님은 손가락이 아프다고 하셨다. 작은 것을 섬세하게 빚다 보면 관절 마디마디가 아프다고 하셔서 쓰윽하고 손을 보았더니 곱상하신 미모와 달리 손가락 마디마디 울퉁불퉁하였다. 말하면 뭐 하리. 한 가지 일을 수십 년 동안 하다 보면 그 일이 일상이 되어 결국 내 그림자가 되어버리고, 내 몸 어딘가에서 여지없이 그 냄새를 풍기는 것을. 신문기사에서도 흔하게 본다. 식당에서 쓰러진 사람에게 심폐소생술로 응급처치를 하고 태연하게 밥을 다시 먹는 사람들의 직업이 경찰관이었다는 것, 주택에 불이 난 것을 아주 능숙하게 잡은 퇴근길 소방관... 등등. 이런 뉴스는 직업병이 좋은 곳에 발휘된 것 같아 훈훈하기만 한데 교사의 직업병은 어떨까. 처음에는 누가 혹시 교사 아니냐고 물을까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피한다. 가르치는 일을 하냐고 물으면 어깨를 흠칫 떨면서 가증스럽게 '설마요.' 하고 얼른 지나쳤다. 처음에는 수줍음이었다면 그다음은 부끄러움이었다. 뭔가 부끄럽다.

교사들에게는 특유의 말투, 즉 남을 가르치는 말투 그리고 시키는 말투가 있다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으나 안다, 날라리 교사라 외치는 나에게 교사라는 냄새가 나는 것을. 딸들이 어렸을 때는 본의 아니게 직업병이 도졌었다. "엄마가~ " 로 시작하지 않고 "선생님이~"로 하면서 말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은 어렸을 때 학교에서는 진짜 선생님을 만나고 집에 오면 선생님의 탈을 벗지 못한 엄마 선생님을 만나는 이중고를 겪었다. '어찌하랴. 지들 운명인 것을...'이라 치부하기에는 아이들이 좀 불쌍했다.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부모는 가르치는 입장에 놓인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칠 것은 왜 그리 많은가. 손 씻기, 수저질, 배변, 스스로 닦기 등 기초생활습관부터 바르게 앉고 예쁘게 말하는 것, 선한 생각을 갖게 하는 등 고차원적인 것까지 그냥 넘어가는 것도 쉽게 배우는 것도 없다. 수천번을 가르치고 말해주어야 한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다. 수천번 말해주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툭 하고 겉으로 나온다. 이렇게 어렵게 가르쳐놓았는데 학교에서 잔소리를 들었다거나 친구와 문제가 생기면 순간 조급해진다. 뭔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처음에는 충격을 받기도 한다. 부모 앞에서와 다른 모습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낯선 행동에 내 아이가 맞나 싶기도 하다.

나 역시 나름의 자부심이 있었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제대로 된 인성을 갖게 하고자 노력했다. 예의 바르게 키웠으며 다른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아이로 키웠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성향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채 권위형 부모로서 약간은 강압적으로 키웠기에 밖에 내보내도 걱정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나와 있을 때와 다른 모습을 보였고 그때서야 알았다. 아이가 다를 수 있음을, 내가 아는 아이가 전부가 아님을. 학교에서 야단을 맞고 오는 아이를 집에 오면 다그치고 또 혼내고, 지겨우리만큼 다짐시켰다. 오히려 학교에서 혼난 것 이상으로 심하게 혼낸  것은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고쳐주고자 하는 마음보다 아이를 잘 키우고 있다는 나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받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아이의 잘못 자체에 대한 속상함보다 '어떻게 내 아이가~'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뭔 말도 안 되는 자존심인가.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보다는 내가 애써 가르치고 만들어놓은 나의 부속물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다.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혼나는 것을 마치 자신이 혼나는 것 같이 민망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숙제를 대신해주기도 하고 변명을 대신해 준다. 아이는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아도 부모 탓으로 여기며, 곧 "부모"라는 로켓배송이 올 거라는 농담도 한다. (실제로 많은 부모가 빠진 준비물을 다시 갖다 주기도 한다.) 아이는 곧잘 자기 잘못을 부모탓으로 넘기며 그것이 불가할 때는 사과보다는 많은 이유와 변명으로 납득시키고자 애쓴다. 아이의 잘못된 부분을 충분히 혼내고 서로 사과를 시키고 나서 부모에게 알려야 할까 말까를 고민한다. 가끔 알려야 할 일이 생겨도 고민한다. 집에 가면 또 새롭게 많이 혼나는 아이들이 있을 테고 반대로 별거 아닌데 선생님이 유난이라고 말할 부모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냥 넘어가는 부모도 있겠지만 다 그렇지 않다. 집에 가서 더 혼나게 되면 아이는 잘하고자 하는 마음이 꺾인다. 집에서마저 또 다른 선생님을 만나는 기분이라 솔직하게 자기 잘못을 이야기하지 않기도 한다.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하기보다 자기 입장에서 억울하고 피해받았던 부분만 이야기한다. 아니면 아예 입을 다문다. 소통이 단절되거나 부분적인 이야기밖에 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은 학교에서의 꾸중과 집에서의 꾸중이 겹치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 아이의 잘못을 알고 그냥 있냐고 반문한다. 물론 가볍게 짚어줄 수 있다. 뭘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도만 묻고 가볍게 끝내는 것도 방법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혼나서 속상하지 않았냐고 다음에 잘해보자고 안아줄 수도 있고 격려할 수도 있다. 그것도 불안하다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별일 없을 때 스쳐 지나가듯이 이야기하듯이 몇 번 더 짚어주는 방법도 있다.


  부모와 교사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지도를 하면 아이는 분명 바르게 잘 성장한다. 집에서 부모만 애쓰거나 학교에서 교사만 애쓰면 아이의 성장이 더딘 것도 맞다. 가정과 학교에서 한 목소리로 아이이 가르칠 때의 효과는 2배를 넘어선다.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좋은 성장을 촉진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와 교사가 서로 신뢰해야 한다. 그럴 수 없는 교사도 많음을 인정하기에 안타깝기도 하다. 그럼에도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입장이기에 믿어주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

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한 가지 일이나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고쳐나갈 수 있게 돕는 것인지 한 가지 방법으로만 해결하는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는 좀 더 이해해 주고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개인적인 역량을 키워준다면 학교에서는 공동체생활 속에서의 역량을 키워주어야 다. 아이가 본인이 잘못한 일에 대해 가정이나 학교 중 한 곳에서 충분히 잔소리 듣고 꾸중을 들었다면 그것으로 마무리하되 양쪽에서 혼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학교에서 혼나고 간 아이를 잘했다고 할 수 없지만 아이 스스로 혼난 이유를 이야기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학교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고 안정된 곳이 바로 부모 품이어야 한다.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따른 부모의 역할과 교사의 역할은 분명 다름을 알고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면 아이는 잘 클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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