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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름달 Apr 19. 2023

교사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

아이를 방목하면 저절로 알아서 잘 클 수 있다고 믿는지 궁금하다.   

  오지라퍼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필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 집 가족들은 모두 오지라퍼이다. 다른 사람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네 가족은 서로 호구라고 비웃지만 사실 너무나도 잘 안다. 타고난 오지라퍼들의 집합이라 순위조차 매길 수 없다는 사실을.

수행평가 범위를 다른 아이들이 놓칠까 봐 단톡에 열심히 올리고 교과서를 안 가져왔다는 아이를 위해 10장이 넘게 사진을 찍어 보내는 둘째를 한심스럽게 보면서 버스 정류장에 약값으로 2000원만 달라는 할머니에게 용돈 털어 5000원을 내어준 첫째를 칭찬해 주면서 살짝 한숨 쉬었다. 뭐, 우리 부부도 만만치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딸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부부를 닮았다. 남일이면 그냥 멀찍이 서서 상관없이 구경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 늘 진하게 관계하여 손해까지 보는데도 고쳐지지 않는다.


  그런 오지라퍼라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보면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학교에 있는 동안만큼은 내 새끼니까 잘 키우고 싶은 욕심이 고개를 드는 것도 크게 한몫한다. 쉬는 시간도 포기한 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바른생활습관과 공부습관을 위해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다. 그런 교사를 고마워하는 부모도 있지만 그것을 학대로 보는 부모도 존재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지만 현실이 그렇다. 수업만 잘하면 되지 쓰잘데없이 깊이 관여한다고, 내 아이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고 싫어한다. 정리하라는 잔소리를 많이 해서 아이가 스트레스받는다는 항의성 문자를 받은 적도 있고, 친구관계를 물었다가 편견을 갖고 아이를 대한다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 복도에서 뛰는 옆반 아이가 위험해 보여 혼냈다가 자기 반도 아닌데 왜 혼내는지 모르겠다고 민원을 넣는 부모를 만난 적도 있었다.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한번 더 먹이보라 권했다가 개인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면 무엇을 지도해야 하는 것일까. 교사가 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아이에게 별 관심과 애정이 없고 민원을 싫어하여 잔소리를 하지 않는 교사를 편하게 생각하는 부모가 꽤 많다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지내고 있다면서 잘한다고 말하고 학기말 상담에서 아이의 단점과 고칠 일을 이야기해 주는 교사는 욕을 먹지 않는다. 아동학대로 오해받지 않으며 되려 자상하고 친절하다고 평가받는 것도 들었다. 정말이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다. 그냥 두는 것이 맞는 것이었을까라는 고민,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방관이 답이었을까. 민원이나 항의를 받지 않으려면 적당하게 관여하되 언제든 발을 뺄 수 있는 위치에 서있어야 하나 싶다가  자체가 큰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교실 속에서 교사가 아이를 방관하게 하는 많은 원인을 짚어보게 된다.  


  코로나기간 동안의 학교생활이 문제일 수도 있고, 교직을 하나의 직업으로 생각하여 일로 아이들을 대하는 교사가 문제일 수도 있다. 거기에 교사를 믿지 못하고 내 아이만 바라보는 부모의 항의와 민원이 더해지면 아이를 그냥 둔다. 깊게 관여하는 사람이 학교에서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흔히 '방목'해서 키워진다라는 표현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제재가 적어진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나서 책을 사물함에서 꺼내와도, 수업시간에 책에 낙서를 잔뜩 하고 참여하지 않아도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그냥 놔두는 경우가 많다. 싸우지 않는다면,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교실 속에서 끊임없이 아이를 주시하고 마음 쓰며 잔소리하고 건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성장을 위한 잔소리는 당연히 없다. 그냥 별 탈 없이 하루를 잘 보내면 되는 교육이 아닌 보육을 하는 셈이다. 그런 교사는 항의를 받지 않는다. 아이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 교사에 대한 불만이 적다. 당연히 부모 마음도 편하다. 볼 수 없는데 아이가 학교 다니는 것에 대해 불만이 없다 하니 문제가 없어 보인다. 잘 포장해서 건네는 평가의 말과 약간의 걱정을 가장하여 말하는 고칠 점에 대해 되려 부모는 고마워한다. 괜찮을까. 정말 괜찮다고 말하기에는 같은 교사로서 양심에 찔린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나의 저주받은 오지라퍼 성격으로는 그들처럼 살 수 없다.

교사라면 고칠 것이 있으면 고쳐주고, 다독이면서 인정해 주면서 아이가 맺고 있는 꽃봉오리를 같이 키워내야 하지 않는가. 같이 잘 살기 위해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존중은 상대가 잘못하는 것을 모르는 척, 못 본척하며 그냥 두는 것이 아니다. 특히 아직 어린아이들이기에 옳고 그름을 구별할 수 있게 도와야 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지니게 해야 한다. 가정교육은 당연히 기본이 되겠지만 함께 살아가는데 필요한 많은 덕목을, 사회적 언행은 실천해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머리로 배우고 가슴으로 느끼고 발로 뛰어봐야 아이의 인격이 만들어지지 않겠는가. 그 장이 바로 학교이고 교실이며, 장을 열어주어야 하는 사람이 교사이다.  '방목' 한채 시간이 흐른다고 저절로 크지 않는다.


  교사의 사명감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다만 사람을 키워내는 일을 하고 있는 교사가 아이를 방관하지 않았음 한다. 직업으로 교직을 생각한다 해도 방관은 분명 업무태만이다. 적어도 잘못을 고쳐나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교사를 믿어주는 부모의 마음과 시선이 필요하다. 무엇이 먼저냐는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싸움이고, 끊기지 않은 악순환의 고리일 뿐이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방관된다. 말이 좋아 방목이지 아무런 제재 없이, 관여가 없다는 것은 아이도 불안하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 될 수 있으며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전에 봉우리채 떨어지게 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부모는 교사의 지적이나 잔소리를 정서적 학대, 지나친 스트레스로 규정짓기 전에 잘 들여다보아야 한다. 교사가 나와 함께 내 아이를 키워내고자 노력하는 것인지 사실 잘 보면 알 수 있다. 평가하기 전에, 단정 짓기 전에 교사를 믿어주어야 한다. 물론 교사 역시 민원이나 항의를 받지 않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거나 나 편하고자 아이를 그냥 놔두지 않아야 한다. 서로 피해 끼치지 않는 것을 큰 목표로 삼지 않고 끊임없이 부대끼면서 자잘한 것을 밀고 당기는 과정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하고 겪게 해야 한다.


  아이를 키워내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 부모도, 교사도. 그렇다면 서로를 더 믿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아이가 방관되지 않고 잘 크지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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