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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운 Jun 01. 2021

90년생 이야기

제주도로 도망간 백수,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



고민이 많을 나이


 숙소에서 쉬는 도중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는 친구는 여행을 가고 싶단 티를 냈다. 나는 그런 친구에게 그냥 제주로 오라고 했고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행기 표를 끊었다. (솔직히 진짜 올 줄 몰랐음 ㄹㅇ;;)


우린 한창 고민이 많을 나이다. (고민이 적은 나이가 있긴 한가...? 10대부터 30대까지 고민 속에서 살아온 거 같다. 하지만 지금이 가장 많다고 느끼는 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우리가 이십 대 초반에 술집에서 만나 친구들과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우리는 자주 가는 2층 이자카야 술집에서 부대찌개 하나에 소주를 몇 병을 마시며 우리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곤 했다. (주로 여자 얘기 군대 얘기 게임 얘기가 주였지만...)  


10년이 지나면 누구는 결혼도 하고 누구는 어디 괜찮은 직장 다니면서 자리도 잡고 그러고 있을 거라고 떠들었던 기억.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잘 다니던 직장을 나온 백수가 되었고, 친구들 중에 한 두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족스러운 직장에 다니지 못한다. 그러니 결혼도 꿈꾸기 힘들어졌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직장과 모아둔 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사랑만 있으면 결혼을 꿈꾸던 스무 살 청년들이 아니니까.


 제일 중요한 이런 시기에 직장을 나온 나도 제정신은 아닐 거다. 아니지 제정신이 아니니까 직장을 나온 거지. 근무환경, 연봉, 늘어나는 매출액만 보면 괜찮은 회사였다. 남들이 퇴사를 말리는 이유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업무와 책임,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는 반대로 가는 대우,  관리자로 근무하면서 알게 되는 내부 사정이나 단가 관련 문제들은 내가 봤을 때 회사가 가라앉는 배처럼 느껴졌다.


 첫 번째 글에 적었던 이유가 가장 컸지만, 이런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다가와 그만두게 된 거 같다. 가라앉는 배에 타 있는 것 보다 구명조끼라도 입고 바다에 빠지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 (물론 아직 내 몸에 맞는 구명조끼도 못 찾았지만...)


 친구를 데리러 나간다. 서귀포에서 공항까지는 1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지만, 제주시에서 보지 못했던 용현 구름다리를 보기 위해 친구 도착시간보다 4시간 일찍 나왔다. 도착해서 다리를 건널 때만 해도 괜찮았던 날씨였는데, 친구의 도착 시간이 다가올수록 날씨가 심상치 않아졌다.


친구가 몰고 온 태풍



친구의 도착시간까지 남은 1시간 반 동안 카페에 있기로 하고 근처에 괜찮은 카페를 찾아본다. 다행히 근처에 평도 좋고 사람도 많이 없는 카페가 있었다. 분위기 있는 내부와 조용한 음악이 마음에 들었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오랜만에 유튜브를 본다. 노는 것처럼 보이는 저들은 사실 생산을 하는 사람이고 진짜 놀면서 소비를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저런 즐기면서 생산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친구의 도착 시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미리 주문한 친구가 마실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고 길을 나선다.




반가운 불청객


  공항 2층 게이트 앞으로 차를 대고 친구를 기다린다. 5분이 경과되면 과태료 나온다고 친절하게 전광판에 안내가 되고 있다. 이놈은 화장실 갔다 온다고 아직도 안 나오고, 조금씩 초조해진다. 1분, 2분, 3분이 흘러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친구에게 인사는 생략하고 소리친다. "야 트렁크에 캐리어부터 빨리 넣고 빨리빨리" 겉으론 평온한 척했지만 미션 임파서블에서 나오는 폭탄 소리가 째깍째깍 들려오는 거 같았다. 과태료 못해도 5만 원은 나오지 않나? 그 돈이면 든든한 국밥 몇 끼를 먹는 거냐고... 그래도 다행히 4분도 안돼서 모든 걸 완료하고 숙소로 출바알~!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밝았는데 그 새 밤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놀러 온 친구 덕분에 가로등 하나 없는 제주도 산길을 달리게 됐다. 운전에 집중하면서 친구와 근황 토크를 시작한다. 그리고 건넨 아메리카노... 친구는 따뜻한 제주 남자의 센스에 마오리 족처럼 혀를 내둘렀다. (조금 과장 섞음)


 그렇게 가다가 차를 세울만한 한적한 갓길 멈춰섰다. 친구 담배도 한대 태울 겸 같이 연돈을 먹기 위해 웨이팅 앱을 켜고 핸드폰 시간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돈가스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얼마나 맛있길래 텐트까지 치고 먹었는지 궁금해 먹어보고 싶었다. (지금은 수강신청처럼 8시 땡 하면 예약을 받는다. 제주도 내에서만 예약 가능) 약속의 8시가 되고 열심히 눌러봤지만 역시나 실패... 이럴 줄 알았다를 외치며 다시 출발한다. 나는 이런 거엔 운이 정말 없나 보다. (로또를 14년을 샀는데 4등 4번이 끝)


 밤눈이 어두워 로터리 출구를 몇 번을 헤매다 결국 도착한 숙소. 그런데 주차공간이 없다. 호텔이라면서... 어제 체크인했을 때는 낮에 와서 공간이 많았는데 오늘은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자리가 없다. 한참을 헤매다 돌담 옆에 딱 들어갈 것 같아 조금 무리해서 주차를 성공시킨다. 그리고 서둘러 숙소 밑에 있는 흑돼지 집에 가보니 웨이팅이 앞에 두 팀이 있다. 마감 시간도 얼마 안 남았지만 주위에 먹을 곳도 없어 그곳에서 먹기로 한다. 웨이팅이 끝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시간... 수다 떨 시간도 없이 진지하게 흑돼지와 한라산을 흡입했다. 흑돼지는 호텔 근처에 있어 맛을 좀 의심했지만, 생각보다는 괜찮고 맛있었다.


흔한 제주 흑돼지


 술은 스노클링의 여파인지 몸이 안 좋아 한 병만 마시고 gg를 선언. (술이 부족한 친구는 한 병을 더 마셨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하고 얼음물 스노클링에 운전만 4시간을 하니 제정신이 아니다. (내가 아니게 돼 버렸...) 숙소에 오자마자 씻고 얼마 안가 둘 다 뻗어버렸다. 친구 때문에 내가 생각한 힐링 일정이 파괴되었지만 그래도 며칠간은 심심할 일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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