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배고픔

소파 밑의 용돈

by 중독작가

1999년 12월 중학교 1학년.


아버지는 장거리 사업으로 집을 자주 비웠다.

일주일, 길면 이주에 한 번 돌아오는 그의 부재는 집 안의 질서를 서서히 무너뜨렸다.

그 틈에서 엄마와 나의 일탈은 조용히 일상이 되었다.

나는 학생에게 금기된 술과 담배로 해방감과 반항심을 배웠다.

아무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엇이든 해도 된다는 허락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일탈은 고스톱이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 이모들과 어울려 두들기던 화투판은 점점 더 커졌고,

결국 하우스를 드나든다는 소문이 작은 시골마을을 돌아 중학교 1학년이던 나의 귀에도 들어왔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집은 늘 비어 있었지만, 냉장고만큼은 비어 있지 않았다. 아이스크림과 온갖 간식들,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장난감과 게임기가 넘쳐났다. 식탁 위에는 늘 엄마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


"소파 밑에 용돈 넣어 놨으니까 저녁 맛있는 거 사 먹어."


부엌에는 늘 여러 끼 분량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는 늘 무언가를 남겨두었지만, 정작 자신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친구들은 우리 집에 오는 것을 좋아했다.

냉장고에는 먹을 것이 넘쳐났으며, 잔소리하는

어른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친구, 게임기를 하는 친구,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친구들.

그곳은 우리만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모두가 기다리던 순간, 소파 밑의 용돈을 확인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날은 2만 원이었다.


“오~~ 2만 원!!”


친구들의 탄성이 등 뒤에서 터져 나왔다.

그 돈의 액수는 단순한 용돈이 아니라, 그날 밤 우리의 안주와 분위기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보통은 만 원이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아마 전날 엄마의 화투패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기대 어린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오늘 내가 족발 쏜다."


손에 쥔 2만 원을 흔들며 외치자 친구들은 환호했다.

보통 참치캔이나 과자 몇 봉지가 메인 안주였던 우리에게 족발은 대단한 고급안주였기 때문이다.

그 환호는 내 안의 공허를 잠시나마 덮어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누군가의 중심에 있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족발을 포장해 역전 다리 밑으로 향했다.

12월 강원도의 겨울밤은 날카로울 만큼 추웠지만, 술이 몸속으로 들어오면 그 추위는 사라졌다.

아니,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노란색 가로등 불빛 아래 우리는 취기와 담배연기가 실린 입김에 추위를 실어 밀어냈다.

밤 10시가 넘으면 친구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을 기다리는 부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늘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나와 태준이었다.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면, 술기운과 함께 모든 감정이 빠져나갔다.

웃음도, 환호도, 해방감도 모두 사라지고, 남는 것은 고요와 공허뿐이었다.

식탁 위에 메모는 그대로 있었고

엄마는 아직 집에 오질 않았다.

엄마는 음식과 돈으로 자신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그러나 그것들로 배를 채울 수는 있어도,

공허한 마음까지 채우지는 못했다.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돈이나 음식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있어주는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엄마는, 그걸 알고 있었을까?